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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Aug 07. 2021

여자는 왜 그랬을까? 또 남자는 왜 그랬을까?

더 리더: 이면을 다시 읽다

책을 읽고 느낀 한 줄.

재미있다. 아름다운 사랑일까? 의문이 든다. 둘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고민이다.

영화가 보고 싶다. 영화도 재미있을 것 같다. (나중에 영화를 보았다. 영화보단 책이 더 흥미롭다. 상상력을 자극한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을까? 의문이다. 그녀는 사랑(? 물론 처음에는 사랑이라 느꼈을 것이다.)보다는 자신의 처한 사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생각이 앞서지 않았을까.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불사하고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쪽지를 남기고 잠시 여행을 다녀온 남자에게 가하는 폭행은 여자가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떠남을 두려워해서 가한 폭력 인지도 모른다. 그게 사랑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의 끝이 집착인가? 집착의 끝이 사랑인가?

 

작가에게 묻고 싶다.

후반부에 여자를 왜 극단으로 몰고 갔는가? 그래야만 여자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뒷부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여자의 마지막 결정이 영화 <친구>의 유오성의 마지막 말로 다가왔다.

“쪽 팔리서, 건달이 쪽팔리면 안 된다 아이가”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가상의 소설을 놓고 법정이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려고 시도하는 이유는, 소설도 현실에 통용되는 법의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기이한 논리 때문이다. 미성년 약취가 현실 세계에서 처벌되어야 하는 불법이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미성년 약취도 따라서 불법이 된다는 논리다.

 

모두들 좋다는데, 나는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불일치에 대해 나는 입 다물기로 했다. 혼자 배배꼬인 인간이 되기 싫어서다.

 

열다섯 살짜리 여중생과 서른여섯 살 먹은 마을버스 운전기사가 만난 지 두 번 만에 섹스에 돌입했다면, 그리고 주구장창 그 일만 되풀이한다면(물론 그 사이에 무시무시한 고전을 읽는다). 당신은 뭐라고 할텐가? ··· 미성년 십 대 소녀가 보호받아야 한다면, 미성년 소년도 당연히 보호받아야 한다. 뭐가 다른데? 변태들!

 

여주인공 한나 슈미츠는 일자리와 질서라는 정상성에 탐닉했던 나치 시대의 평균적인 독일인을 보여준다. 이때 그녀가 소년에게 즐겨 들었던 도서 목록의 대개가 고전이었다는 것은 정상성 희구의 좋은 증빙이 된다.

 

이 소설이 단순한 연애담이라면, 한나 슈미츠의 자살은 예정된 것이다. 슈미츠 부인이 기소되었 때의 나이가 마흔세 살이었으니, 18년 동안의 형기를 마쳤을 때는 예순한 살이 된다. 그녀는 마흔 살의 미하엘의 연인이 될 수 없다. 그건 더 이상 왈가왈부를 허용하지 않는 완벽하고, 닫힌 결론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애사보다 작가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점을 중심축으로 놓고 이 소설을 읽을 때, 그녀의 자살은 독자들에게 무성한 이론과 열린 결말을 선사한다. 나는 그녀의 자살로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21세기 독일인의 무죄 항변을 떠올리고, 또 나치 독일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우고 싶은 21세기 독일인의 과거사 청산 의지를 본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한나 슈미츠의 문맹은 지극히 개인적인 그녀만의 본원적 약점을 뛰어넘어, 좀 더 정치적이고 역사적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한나 슈미츠 부인의 문맹은 그녀의 치부이면서, 홀로코스트 범죄에 참여했던 나치 부역자들의 순진무구함과 무죄성을 은유한다.

_장정일,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장정일의 책을 읽으며 다시 《더 리더》를 다시 읽으며 생각했다.

소설을 가지고 현실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장정일이 외설의 절대적인 피해자임을 그는 말하지 않지만 근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나만 외설이냐’라고 말하는 듯하다. 외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독자만 판단할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본 몇 가지.

 

왜 여주인공 한나 슈미츠는 문맹인가?

왜 연상(여자) 연하(소년) 커플인가?

왜 (어린아이와) 섹스를 하였는가?

왜 고전을 읽어주었는가?

왜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내가 읽은 것은 글자를 읽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그 내용의 근간이 무엇인지 고민한 흔적이 없다. 소설을 고민하면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하지만 장정일의 생각이 옳다. 책의 행간을 읽지 못하고 표면적인 내용에만 얽매임을 알 수 있다.

 

여자는 왜 그랬을까?

또 남자는 왜 그랬을까?

 

한국영화 <녹색의자>가 생각났다. 내용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같아 보인다. 남자는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여자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혼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혼을 한 것인가? ...

 

이 책을 읽는 동안,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머리를 맴도는 생각.

여자는, 남자는 왜?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만일 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좀처럼 답을 내릴 수 없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자기가 여자에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에 따라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지켜주는 것이었을까?


덧_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이레

장정일,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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