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5주~2월 2주 (헨리나누웬|IVP|2002.07.10|222p)
긍휼
'19~'20년 연말연초 어쩌다 보니 20년 전 구입하여 서재에 잠들어 있던 신앙서적을 많이 보게 되었다. 다 한 번씩 읽어봤던 책들을 10여 년이 지나고 다시 읽어보니, 그때 그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단어 하나와 문장 하나가 내포하는 깊이를 경험해본다. 갑자기 신앙서적이 읽고 싶어 진 건 왜일까? IVF 캠퍼스 시절에 대한 추억? 2019-2020년 나에게 일어난 많은 변화? 신앙의 회복? 무언 지는 모르지만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하나 연결되어 현재의 나를 만들고 있고, 미래의 나를 만들어가고, 방향을 잡아주고 있는데 그중 신앙이 중요한 부분임이 확실하다.
지난 몇 년간 매일 아침마다 긍휼을 구하는 기도로 시작했다. 단순한 문장, 단순한 기도였지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강력한 것이었음을 2020년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교회를 처음 다니기 시작한 지 25년이 지났고, 광야에 40년 보낸 후인 지금에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해 준 사건과 사람들에게 새삼스레 고마움을 느껴본다.
올 한 해의 시작은 긍휼로 시작했다. 이 부분을 너무 상세하게는 표현할 수는 없으나, 나는 그 기간 동안 "아픔"이란 단어와 함께 했었고, 역설적이지만 이때 "긍휼"이란 단어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픔의 원인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경쟁" 때문이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온 삶의 습관과 그로 인해 "성취한 것들"과 "잃어버린 것들"이 대조를 이루지만 모두 내 삶의 흔적으로 남기어져 있다. 인간에 대해 다소 차가운 시선으로 들여다본다면, 인간의 삶을 움직이게 하는 주된 동력은 "경쟁심"이지 "긍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항상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사고방식으로 "차이점"을 만들어 내고, 비교 상대가 어떠냐에 따라서 이 차이점은 우리를 구별하게 하고, 자랑스럽게도 하는 반면 내세울 만한 특별한 것이 없다면 우리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하여 더욱 차이점을 만들어 내려는 "삶의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동력으로 움직이는 우리 인생의 방향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이 동력이 없어지면 우리 인생은 멈추는가? 모든 것 속에 스며든 경쟁심, 우리가 맺는 관계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경쟁심 때문에, 우리는 서로 끈끈하게 결속되지 못하고 긍휼로 가는 길도 방해를 받는다.
이제는 방향을 바로 잡고, 경쟁과 조급함에서 긍휼로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할 때이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
1. 긍휼
1)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splangchnizomai) : ‘긍휼로 마음이 움직여서’
2) 헬라어 ‘스플랑크나’(splangchna) : ‘뱃속 깊은 곳(gut)', 이 곳은 가장 친밀하고도 강렬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곳. 강렬한 사랑과 강렬한 미움이 커가는 중심 장소.
3) 히브리어 '라카밈(rachamim)' : ‘긍휼’, 하나님의 자궁을 일컫는 말. 예수님의 긍휼이 어찌나 깊고 중심적이며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되는 것
4) 라틴어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되었고, 이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받다'는 의미, passion'과 'patience'도 파티에서 유래된 것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내하며 사는 삶. 영어 단어로는 com-passion 임.
2. 경쟁 : competition, ‘함께’라는 의미의 com과 ‘추구하다’라는 의미인 petere의 합성어라. 본래 경쟁이란 함께 추구함으로써 공생하는 것이라는 뜻인데, 산업시대에 들어 산업분류가 생겨나고 업종이 나뉘면서 시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점유율을 다투는 의미로 변질.
3. 조급함 : impatience, 다른 사람의 실수나 기다리는 것 때문에 쉽게 짜증이 나는 것, 가능한 빨리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 (캠브릿지 영영사전) 참을성이 없이 몹시 급하고, 바쁘고, 성급함. 낙심과 조급함은 항상 같이 따라다닌다.
1월 초에 발행한 "왕의 아이"라는 글에서 톰이라는 아이는 존재가 새롭게 변화되었지만 계속되는 고민과 옛 습관들로 계속 챗바퀴를 돌게 된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 변화가 생겨났고, 이 변화의 힘은 바로 "긍휼"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분의 긍휼로 인해 내 맘에 생겨난, 아직은 성글어지지 않은 긍휼로 남을 보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선행을 하고 싶다. 무언가를 증명하고 경쟁하기 위해 보이고 싶은 것이 아닌, 긍휼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고 싶다. 경쟁의 방향에서 긍휼의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하여 가족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체휼하며 사는 여유"를 갖고 싶다.
조급함(impatience)은 항상 시간과 연루되어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발생하는 우리의 조급함은 가능한 빨리 번화되어 주었으면 하는 갈망을 드러낸다. "버스가 좀 빨리 오면 좋겠는데... 돈이 빨리 벌리면 좋겠는데... 집이 빨리 생기면 좋겠는데... 얼마나 기다려야 도착하거나 얻을 수 있을까?..." 등의 표현들은 내면의 불안을 드러낸다
근본적으로 조급함이란 공허하고 무익하며 무의미한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한 빨리 지금 여기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조급함의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시계 시간에 맞춰 사는 것이다. 일직선적인 시간 개념으로, 이 시간 개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벽시계, 손목시계, 달력에 나오는 추상적인 단위로 측정된다. 우리의 삶은 각종 시계들의 지배를 받고 있고 우리의 가장 깊은 정서는 시계가 주는 영향력에 사로잡히곤 한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우리들 대부분의 삶이 시계 시간과 다른 순간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인내의 경험이 편만한, 질적으로 다른 순간들이다. 그것은 바로 그 순간을 충만하고 풍요로우며 의미 있게 보냈던 경험이다. 이런 경험들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있는 그 자리에 머물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중요한 것은 충만함, 내면의 중요성, 성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 진정한 삶이 우리를 감동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사건의 일부이고, 우리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 순간이야 말로 충만한 진리를 품고 있다.
인내는 시계 시간을 쫓아내고 새로운 시간, 즉 구원의 시간을 드러낸다. 우리가 시계와 달력의 노예로 있는 한, 우리의 시간은 공허할 따름이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은혜와 구원의 순간을 놓치게 된다. 시간의 충만함이 이미 여기 있으며 구원도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서서히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인간적인 사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1부 긍휼의 하나님
제1장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제2장 종되신 하나님
제3장 순종하시는 하나님
요약.
예수님의 치유는 그분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이지, 무엇을 증명하거나 감동을 주거나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는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없애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무엇보다도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결속의지로부터 새로운 삶이 나온다.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예수님이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마음이 움직이신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향한 움직임이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에 하나님의 긍휼의 진수가 선포되어 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됨으로써 의존적이고도 두려운 상황을 온전히 맛보셨을 뿐만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형태의 죽음(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죽음까지도 경험하셨다. 그분은 단순히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거부당하고 실패한 형태의 인간이 되셨다. 그분은 인간의 불확실성과 두려움만 아셨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뇌와 고통 그리스도 범죄자로 낙인찍혀 피비린내 나는 고문과 죽음에 이르는 완전한 추락을 경험하셨다. 예수님은 이런 굴욕을 통해, 긍휼로 자기를 비워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를 완전히 몸으로 살아내셨다. 점으로 낮아지셨고, 인간의 갖난 아이로 낮아지셨다. 우리와 나와 너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제2부 긍휼의 삶
제4장 공동체
제5장 이동
제6장 함께함
요약.
기독교 공동체의 역설은 구성원들이 자발적인 이동(displacement)을 선택함으로써 함께 모인다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함께함은 바로 이동 안에서의 함께함이다. 우리는 평범하고 적당한 삶을 사는 평범하고 적당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이렇게 평범하고 적당한 장소에서 나와 이동하라는 부르심이다. 복음은, 안락한 곳, 우리가 계속 머물고 싶어 하는 곳, 우리가 편안하게 느끼는 곳에서 떠나 이동하라고 초청한다. 공동체는 자발적인 이동을 통해 형성되고, 깊어지고, 강해진다. 우리는 자발적인 이동을 통해, 서로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하나의 인류 가족의 구성원임을 발견한다.
자발적인 이동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자발적인 이동은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모이게 될 때만 의미가 있다. 공동의 언약함 가운데 서로의 동일성을 깨닫고, 우리의 독특한 재능이 공동체를 세우는 데 필요한 은사임을 발견하며,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다. 이 부르심은 직업 세계에 대한 열망을 넘어서서 함께함의 소명으로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권유한다.
제3부 긍휼의 길
제7장 인내
제8장 기도
제9장 행동
요약.
긍휼의 삶이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내하며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긍휼의 삶을 사는 길(긍휼의 훈련)에 대해 묻는다면, 인내야말로 바로 그 해답이다. 인내하지(be patient) 못한다면, 우리는 함께 인내하지도(be compatient) 못한다. 긍휼의 주님의 제자에게 인내는 힘들지만 열매 있는 훈련이다. 인내는 시계 시간을 쫓아내고 새로운 시간, 즉 구원의 시간을 드러낸다. 이 시간은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되는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단위의 시간이 아니라, 내면에서 충만하게 살아내는 시간이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도 바로 이런 시간이다. 인내의 훈련으로서의 기도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재창조 사역을 하시도록 우리를 내어 드리는 인간 편에서의 노력이다. 기도는 긍휼 어린 심장의 박동 그 자체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그들을 우리 자신의 일부로 품는다는 의미다. 기도한다는 것은 동료 인간들과의 깊은 내적 결속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접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기도는 우리의 공통적인 고난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해줌으로써, 치유하시는 성령의 임재 속으로 함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해 준다. 정말로 기도는 구체적인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은 기도가 아니라 바로 행동이다.
감사하는 마음 : 훈련된 행동의 특징은 늘 감사이다. 분노는 우리를 적극적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우리 안에 많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킬 수도 있다. 분노에 찬 행동은 상처 받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반면, 감사에 찬 행동은 치유받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감사에 찬 행동은 나눠주고 싶어 한다. 감사야말로 그 행동이 인내의 한 부분으로 취해진 행동이라는 표시이다. 그것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그 행동은 강제적이 않고, 자유로우며, 음침하지 않고 즐거우며, 광신적이지 않고 자유케 해주는 것이다. 감사가 행동의 근거가 될 때, 우리가 주는 것은 받는 것이 되며, 우리가 사역하는 대상은 우리에게 사역자가 된다.
결론
우리가 받은 가장 위대한 소식은 바로 하나님이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순종적인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성에 매달리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사 우리와 같이 되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긍휼의 충만하심을 계시하셨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위대한 부르심은 바로 긍휼의 삶을 살라는 부르심이다. 이동을 통해 형성되어 새로운 방식의 함께함으로 나아가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제자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과업은 긍휼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인내의 훈련을 통해 기도와 행동을 실천하는 가운데 제자의 삶은 진정하고 결실 있는 삶이 된다.
에피로그: 2020-02-03. QT. 12제자를 보내시다 (누가복음 9:1 ~ 9)
(긍휼이란 책을 읽으며, 매일 QT 했던 내용 중 책과 궤를 같이한 내용이 있어 남긴다. 기막히게 1월에 긍휼을 경험하게 했던 아픈 사건도 있었다. 그 사건을 통해 긍휼이 처음으로 내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자신의 동료와 동역자로 여기시며 파송하신다 (누가복음 9장). 그 후 9장 10절에서 제자로 보냄을 받았지만 사도가 되어서 돌아왔다. 같은 9장이지만 제자에서 사도로 신분이 변화되었다.
이 변화가 일어난 사건의 중심에서는 제자들이 파송을 받았고, 제자들은 돈과 양식과 두벌 옷 조차 가지지 않은 가난과 겸손으로, 밤에는 잠을 잘 숙소조차 없는 상황에서 다른 아무도 모르는 한 사람의 집에서 거해야만 했다.
많은 사람의 집도 아닌 한 사람의 집에서 며칠간 아무런 돈도 주지 않은 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해결하고 잠을 청하며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신세를 져야 했는데,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고 미안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자들이 받은 섬김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이 채우는 것이라는 믿음을 알려주시기 위한 훈련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복음을 전하는 훈련과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훈련을 하게 하셨고 이를 통해 제자들은 비로소 사도로 변하게 되었다. 헬라어로 ‘제자’라는 단어는 ‘마데테스’로 배우는 사람,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면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즉, 어떤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이다.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드고 배우는 제자의 삶에만 머무르고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거룩한 일에 자신을 헌신하고 구속사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적인 삶"과 "긍휼의 삶"을 살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이 변화가 일어난 시기가 바로 복음을 전했던 시기 그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그 한 집에서 섬김을 받았던 겸손한 시기였다.
남들이 모두 소유하고 있는것 같은데 나만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지 못할것 같은 그런 시기가 하나님의 뜻이고, 한 집에 머물면서 제자에서 사도로 변화되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고, 나와 우리 가족 모두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훈련의 과정이란것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