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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가족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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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글사랑 Dec 17. 2023

쫓기는 자

그냥 갈까 봐 가슴이 콩닥 거렸다.

새로 구입한 세탁기를 놓기 위해 4~5년 쓴 통세탁기를 버려야 했다. 멀쩡한데. 전화를 받지 못해 일정이 미뤄진 탓에 남편은 번거롭게 하지 말고 폐기가전으로 수거시키라 했다. 중고매장에 팔려면 물건이 들어오는 날 1층에 내려놓고 일정을 잡아서 판매를 해야 하는데 세탁기가 들어오는 날 오후에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냥 버리라는 남편과 쓸 만한 걸 그냥 버리는 게 아까운 어머니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 중고매장에 사진을 찍어 올렸다. 저녁에 올렸는데 아침에 채팅이 들어와 있었고 올려놓은 가격에서 2만 원을 깎았지만 공짜로 버리려 한 것에 비하면 큰 금액이었다. 바로 답장을 보냈다.


“오늘 거래 가능합니다. 지금 물건이 들어와서 설치 중입니다.”라고 채팅을 남겼다. 남편은 가져간다고 했다가 상태를 보고 안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며 겁을 줬다. 왔다가 정말 안 가져가면 우리가 스티커를 사서 버려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에 집 근처 중고용품점에 연락해 견적을 받았다. 세탁기 설치가 끝나고 설치팀이 건조기를 가지러 내려갔다. 서둘러 겉옷을 입고 따라나섰다. 차에 실은 세탁기를 1층 문 앞에 좀 내려달라고. 중고매장에 내놓았는데 가지러 온다고 연락이 왔다고 하니 자기도 자주 이용한다며 이해했다. 건조기를 가지고 올라간 사이 작은 트럭이 주차장에 들어섰다. 나의 거래인이었다.


좀 일찍 오시지. 시간이 맞으면 설치팀에 부탁해 세탁기 드는 걸 도와달라고 하려 했다. 건조기를 들고 올라가자 도착했다. 나이 지긋한 분 혼자 왔다. 우선 세탁기 상태를 본다고 안과 수평, 아래 부분을 면밀하게 살폈다. 남편 말대로 그냥 갈까 봐 가슴이 콩닥 거렸다. 작동은 잘 되는 거냐고 묻더니 짐수레를 가져와 세탁기를 번쩍 들었다. 왜소한 체격과 달리 노련하게 세탁기를 운반했다. 뭔가 도와줘야 할 거 같아 옆에서 끙끙 거리며 애를 태우니 나의 그런 모습이 웃겼는지 괜찮다며 웃었다. 세탁기를 싣고 현금으로 값을 주고 떠났다. 세탁기의 뒷모습을 보며 찬바람만큼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냉장고는 17년 썼고, 텔레비전은 18년째 멀쩡하다. 어머니가 쓰던 김치냉장고는 재작년에 바꾼 만큼 가전제품의 수명이 긴데, 멀쩡한 세탁기를 버렸다. 그냥 버렸다면 잠이 안 왔을 것이다. 생활용품을 수리한 후 값을 더 주고 파는 분이 가져가 안심이 되었다. 돈을 받고 파는 거라 아침부터 거름망과 세제 통을 한 번씩 더 닦고 구석진 곳에 묻은 찌든 때도 닦았다. 평소에 조금 더 신경을 쓰고 관리해주지 않은 게 미안했다. 그래서 거래인이 2만 원을 깎을 때 새 거름망으로 교체해 새 주인을 만나길 바랐다.


세탁기는 시누가 아버님에게 준 선물이다. 장마로 빨래가 잘 안 말라 거실 소파에 널어진 모습을 보고 사주었다. 주변에서 건조기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멀쩡한 세탁기를 버릴 수 없었다. 살 때 같이 사야 깔끔하다고. 공짜로 생기는 세탁기와 돈 받고 버리는 세탁기.


연말이라 정신없이 바빴다. 비 오는 퇴근길 남편 바지를 사서 퇴근하는데 중고매장에 사진 찍어 올려보라는 시누 말이 귀찮았다. 다음 날 배송 일정이 확정되고 중고매장에 올리지 않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내 성격을 알아서일까. 남편은 오히려 화를 내며 그냥 버리라고 했다. 당일 남편 신경 쓰지 않게 수소문했고, 세탁기 판 현금을 보여주니 졌다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양쪽 일정을 맞추기 위해 쫓기며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 쪽 저 쪽 눈치를 보고 소리 없이 수습했다. 결국 판매한 돈을 손에 넣으니 그동안 쌓였던 감정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갑자기 집안에 묻혀둔 물건을 하나 둘 찾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중독이란 말인가. 어차피 내가 쓰지 않는 묵은 물건이라면 필요한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것도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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