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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Sep 09. 2019

밥과 똥의 굴레에서

호두는 17개월이다. 숟가락 쓰기가 서투르니 아기가 자꾸 손으로 음식을 퍼먹는데, 손에 아토피가 심해서 몇 주 전부터 내가 떠먹여 주고 있다. 아이 떠먹이다 보면 왠지 정신이 없어서 아이를 다 먹인 후 그제야 내 밥을 먹는다.


육아 초반에는 귀찮고, 정신이 없어서 밥을 먹지 않은 적도 있다. 제때 챙겨 먹지 않은 밥이, 굳이 챙겨 먹지 않은 영양제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몰고 오는지 돌 이후 몰려온 병으로 혹독히 겪었기에 이제는 밥에 김치 하나라도 제때에 끼니를 챙겨 먹으려 애쓴다.


오늘도 조촐한 반찬과 함께 꾸역꾸역 잘 넘어가지 않는 밥을 넣고 있는데, 호두가 이잉 한다. 돌아보니 갈색의 형체가 거실 중앙에 떡 놓여 있다. 기저귀 발진 좀 가라앉으라고 기저귀를 벗겨 놓았더니 아기가 똥을 싸놓은 것이다. 갑자기 호두가 외쳤다.


"배앰! 배애애앰!"

 

자기가 보기에도 자기 똥이 그림책에서 본 뱀처럼 길고 동그랬나 보다. 밥 먹다 똥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빵 터졌다. 아이의 엉뚱함이란. 뱀이라며 호들갑 떠는 녀석을 그대로 들쳐 업고 화장실로 향했다.


똥을 치우고 온 뒤 다시 식탁의자에 앉으니 솔직히 입맛이 싹 가셨지만, 그래도 건강을 위해 다시금 꾸역꾸역 넣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이번에는 그림책 가져와 내 허벅지를 밀기 시작한다. 이잉이잉. 징징대며 그림책으로 계속 민다. 그림책을 읽어달란 소리다.


오죽 심심하면 이럴까 싶어 구연동화에 열을 올리며 열심히 목소리 다르게 읽어주었다. 아 이제 한 술 뜨자 싶었더니 녀석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이잉이잉. 한 번 더 읽으라는 소리다.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최소 3번 이상은 읽어야 하는 녀석의 습관이 다시금 시작됐다.


요즘 호두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최숙희 작가의 '괜찮아'이다. 호두가 좋아하는 동물이 다양하게 나오고, 마지막에 아이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크게 웃을 수 있어 하하하하하하 하는 장면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서는 내가 정말 파안대소를 하며 읽어주는데, 호두는 그 순간을 참 좋아한다. 재밌게 읽어주려고 했던 노력이 호두에게 적중했으나 나는 조금 더 피곤해지는 이 아이러니란.


전혀 괜찮지 않은데 괜찮아를 3번쯤 읽으니 입에 단내가 난다. 다시 또 밥을 욱여넣는다. 자기도 좀 심하다 생각했는지 호두가 저만치 가서 다른 책을 꺼내 혼자 읽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녀석이 왜 하필 '괜찮아' 그림책을 가져왔을까 뜨끔한다. 어떤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괜찮은 것이라는 그림책의 내용. 엄마, 나 똥도 싸고 그림책도 읽어달라고 떼쓰지만 호두 괜찮지 않아라고 묻는 듯하다.


육아를 하면 밥과 똥은 늘 공존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밥 먹다 똥 치우기가 적응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전히 냄새나고 힘들지만,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그렇게 똥을 치우고 나서도 밥이 들어간다. 이 사실이 꽤 슬프게 느껴지다가도 어떤 순간에도 더러움을 이겨내며 밥을 먹을 힘이 생겼다는 것이 괜히 든든하다. 왠지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비록 우아한 식사는 일찌감치 사라진 듯 하지만, 아이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다른 우아함은 생긴 것 같다. 밥과 똥이 공존하는 엄마의 식탁이지만, 똥을 싼 아이의 건강한 장과 그림책을 좋아하는 아이의 예쁜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우아함을 배워가고 있다. 우아함을 잃고, 우아함을 얻는 제로섬 게임 같은 육아. 오늘도 잘 커준 호두와 잘 견뎌준 스스로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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