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빗소리 Sep 16. 2023

누군가의 유리 천장


처음에는 쉬운 마음이었다. 레나와 함께 몇 주 동안 대회를 준비하며 아이의 가정이 많이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 2학기에 한 재단의 장학금 추천 공문이 왔고, 담당자였던 나는 교무위원회에서 레나의 집이 상당히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들은 대부분의 저소득 아이들이 풍부히 장학금과 지원을 받는 상황에서 레나 같이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가 있다면 받는 것이 맞다며 모두 동의해주셨다. 처음에는 그렇게 순풍에 돛단 듯 흘러갔다.




장학금 업무를 오래 해왔던 나는 레나의 신분과 경제적 어려움을 증빙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레나의 서류를 제출한 뒤 재단에서 이것으로는 증빙서류가 마땅치 않다는 답변이 왔다. 외국인인 부모님의 등본까지 제출하라는 황당한 요구에 외국인들은 등본 발부가 어렵고 외국인 사실 증명서만 가능하다는 내 말도 믿지 않았다. 결국 동사무소에 전화하여 외국인이 받을 수 있는 서류가 그것 하나라는 확답을 받고서야 재단은 등본을 제출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여기까지 왔을 때 나는 이 싸움은 단순히 레나가 돈을 받고 안받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이건 레나가 뚫어야 할 유리천장이었다. 재단에서는 한 번도 외국인 가정이 장학금을 받은 적이 없다 라며 난감해했다. 내 생각은 자국민이든 외국인이든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이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오해가 있을까 부연 설명을 하면 우리 학교는 소규모 학교라 한국 국적을 가진 저소득층의 모든 아이들이 한 해 동안 여러 장학금을 겹쳐 받으며 풍부히 지원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레나는 저소득층 아이로 증빙이 안되기에 한 번도 장학금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학교 입장에서는 레나 또한 지원을 받는 것이 마땅했다.




처음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와 처음이 되기까지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아직 어린 레나 대신에 레나의 대리인이 되어 싸워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유리 천장을 뚫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레나를 위해 싸운 노력은 앞으로의 비슷한 싸움들을 위한 좋은 데이터로 남을 테니까. 매우 중요한 서류이니까 꼭 잘 써와야 한다며 두 번, 세 번 반복한 내 말의 엄중함을 믿고 레나는 장학금 서류마다 엄마를 대신해 삐뚤빼뚤한 글씨를 채웠다. 4장이나 되는 많은 서류를 가득 채워 온 아이의 글씨를 보는 순간 마음이 뭉클했다. 레나의 어머니 또한 직장이 끝난 뒤 늦은 밤까지 내가 부탁한 추가 서류들을 준비하여 보내주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러시아어밖에 못하는 레나 엄마가 한 글자 한 글자 어렵게 눌러 보낸 메시지였다.




그렇게 며칠을 재단과 옥신각신하며 추가의 추가 서류까지 냈지만, 3일 뒤 재단에서 결국 규정에 “1년 이상의 실거주가 증명되는 주.민.으.로.등.록.된.자”만 가능하기에 외국인은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허탈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규정상 외국인은 안 된다 이야기했으면 되지 왜 이렇게 추가 서류들을 요구했는지. 담당자에게 전화하여 한참을 호소했다.




“제가 돈 받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아이가 어렵다는 데 왜 되지 않나요. 저 또한 외국인을 선정하고 추천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실질적으로 어려운 아이가 장학생이 되는 것이 맞다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담당자분이 아무 힘이 없다는 거 저도 알지만, 누군가에게라도 말하고 싶었어요. 이 아이의 경제적 수준이 어려운 건 사실이고, 학교는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을요.”




담당자는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끊었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너무 우울해서 멍하게 있다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이 일은 정말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네요. 이 아이를 도와주세요.




한참 기도를 하고 퇴근할 준비를 하며 30분 정도를 보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장학재단 담당자의 번호였다.




“선생님께서 너무 안타까워하셔서 재단에 거듭 호소했습니다. 그랬더니 재단에서 규정은 그렇지만 예외사항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해주셨네요.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제가 서류로 괴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레나는 모르는 레나의 승리. 서류를 냈으니 당연히 장학금을 받을 거라 기대하며 있었을 레나는 꿈에도 이런 과정들을 모르겠지. 그렇게 나는 주인공은 모르는 주인공의 승리를 몰래 만끽했다. 어쩌면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싸움들은 보이지 않는 싸움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싸움 속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선택하고 그 옳은 방향을 위해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승패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의 데이터가 훨씬 더 소중하므로. 그 데이터들이 모여 더 큰 승리를 부르는 것이기에.




레나의 유리 천장을 뚫는 일. 반대의 시각에서는 쓸데없는 열정의 소모였을지도 모른다. 그깟 몇십 만원이 아이의 경제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어주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 장학금이 열심히 아이를 키우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레나 부모님과 외국에서 작은 뿌리를 내려가며 어떻게든 발을 붙이며 살아가는 레나에게 “잘해왔고, 잘해나갈 거야.”라는 응원이 되길 바란다. 우린 결국 삶이라는 처음 살아보는 영역에 던져진 이방인들이니까.









대리님과의 마지막 연락. 본의 아니게 양측 대표가 되어 무수히 갈등해왔지만, 결국 마지막은 한팀이 되었던 우리의 기록.



매거진의 이전글 커피로 사기를 당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