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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그미 May 18. 2024

프롤로그-하루, 하루

일신, 일일신, 우일신.

1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일 조금씩 다르다. 일단 날짜가 다르고, 먹는 밥이 다르며, 그날의 대화가 다르다. 기분도 다르다. 사랑도 다르다. 나는 너를 오늘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런 것을 묻고 따지고 재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이다. 매일에 사랑은 있다. 오늘 먹은 밥이 그가 좋아하는 백미밥으로 채워져 잡곡밥을 좋아하는 내가 어딘지 헛헛하다 싶은 느낌이 드는 하루를 보내기도 하듯이, 너의 사랑이 오늘 백미밥이어서, 잡곡밥인 나의 사랑이 좀 고슬고슬했을 수도 있다. 첫째를 향한 사랑도, 둘째를 향한 사랑도, 매일매일 다르다. 어느 날은 건조한 관심과 건조한 사랑을, 어느 날은 습한 관심과 불쾌할 만큼 끈덕진 사랑을... 하루하루는 조금씩 그런 것으로 다르고, 큰 틀에서 반복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기가 깨지 않게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둘 중 한 명이라도 깨면, 기저귀를 갈아주고, 먹을 것을 먹여 주고, 닦아 준다. 하루는 그렇게 시작한다. 큰 틀에서, 때가 되면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고, 때가 되면 몸을 씻고, 대략 때에 따라 몸을 뉘어 잠든다.


2

오전 6시. 집은 아이들의 긴 숨소리만 들리고 조용하다. 불현듯 눈을 뜬 것을 보니 방금 남편이 출근했나 보다. 나는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조용히 잠을 깼고. 창으로 보이는 바깥 하늘의 색은 검푸르다. 아이들이 부디 내 부스럭거림에 깨지 않고, 깊은 아침잠을 즐겨 주길. 그런 쓸데없고 작은 소망을 품고 다시 누워 본다. 때때로 운 좋고 기운 좋게 아침 샤워를 하기도 한다.

정말이지, 세상은 너무 일찍 깨어난다. 나의 하루는 너무 일찍 시작된다.

오전 7시. 이크, 첫째가 잠을 깨었다. 아직 아침식사 준비를 마치지 못했는데! 아침잠을 깰 때마다 곁에서 사라진 아빠를 찾으며 우는 아이를 안아서 달래준다. 밥을 먹겠느냐고 구슬려 거실로 데려간다. 장난감을 혼자 가지고 놀거나, 기차 영상을 보면서, 첫째가 식사 준비를 기다려 준다. 앗, 안 돼. 둘째가, 둘째가 깨어났다! 빨리, 분유를 타자.

오전 7시 30분. 결국 오늘도 이렇게 되었구나. 어머님이 도착하셨다. 첫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시며 '밥은 먹었어?' 하고 손주를 챙기신다. 그 앞에 내가 만든 아침 식사가 나타난다. 종종 유부초밥, 간단한 계란 요리, 주먹밥 등이다. 어떤 음식이 나타나든 아이를 위해 어머님은 '우와, 엄마가 정말 맛있는 거 해줬네~ 어서 먹자.' 하신다.

오전 8시 10분. 설거지 후 씻기. 내가 씻고 나면 아이도 양치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며 등원 준비를 한다.

오전 8시 40분. 이제는 출발해야 한다! 아이와 길을 나선다. 어머님과 둘째 아이에게 인사를 건넨다. '다녀오겠습니다.'

오전 9시 10분. 우리 아이 목청도 참 좋지. 교실에 들어가며 매번 우는데, 등 돌려 몇 발짝 걸어도 그 우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배경 삼아 전화기엔 앱 알림이 새로 띄워진다. '원아가 9:08에 등원하였습니다.'

오전 9시 30분. 집에 도착한다. 둘째는 대개 잠들어 있다. 어머님이 그새 수건빨래를 해 주셨다. 건조기 도는 소리, 어머님과의 짧은 대화. 어머님은 댁으로 가신다.


3

아이의 오전 잠은 짧다. 품에서 자는 걸 좋아하는 아이는 바닥에서 오래 견디지 않는다. 깨어난 아기에게 오전 이유식을 준다. 아이는 이유식을 만지며 먹고 싶어 한다. 먹고 나면 당연히 씻는 시간. 이건 아이를 키운 사람만이 안다. 아이가 음식을 탐색하는 것은 어른의 그것과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식기로 건드려 눈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그릇에 풍덩 빠뜨려 휘젓고, 들어 올리고, 냄새 맡거나, 입에 대거나, 식판에 대고 바르고, 문지르고, 뿌린다. 아이를 씻기고 흩뿌려진 음식물을 닦아낸다. 먹고 기운을 찾은 아기는 논다. 내 몸을 붙들고 일어서기 연습을 한다. 장난감에 주의를 돌려주고 설거지를 하려 일어서면, 흥이 짜게 식은 표정으로 장난감을 든 채 나를 바라본다. 음, 혼자 놀면 안 돼..?


4

가끔 둘째를 품에 안고 베란다에 늘어선 화분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창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바로 앞에 공사장이 있어, 건설자재의 먼지를 품은 바람일 터이지만, 상관없다. 우리는 바람을 통해 환기하고, 바람을 맞으며 우리가-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한다. 여기는 우리 집이다. 아가야, 보렴. 저기 엄마가 기르는 풀들이 있다. 보렴, 잎사귀 바람에 흔들린다. 미니홍콩야자, 박쥐란, 콩란, 장미허브, 틸란드시아, 세이지... 식물에게 인사를 건네 볼까? 잎을 어루만지는 거야. 옳지. 어루만져... 당기지 마, 당기지 마! 어. 루. 만. 지. 는 거야~

아기가 잎을 먹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에서 잎을 빼앗아 낸다. 이제 그만, 거실로 돌아가자.


5

최근 세이지에 꽃이 피었다. 이제는 철거되어 사라졌을 도마동 녹산빌라에 살 때, 씨앗 심어 싹 틔운 것이 11 포기였다. 이제 한 포기만 남아 4년째 자라고 있는데, 처음으로 꽃을 보여 주었다. 꽃대가 오른 모습을 보았을 때는 충격받았다. 꽃이 피고는 커먼세이지의 꽃이 그토록 부드러운 보랏빛임을 알게 되었다. 세이지는 가지를 많이 가져서, 꽃대를 두어 대 꺾어 실내에 꽃은 뒤로도 몇 줄기 더 솟아나 꽃을 피웠다. 이 세이지는 목질화가 이루어져 한 포기라고 부르기에는 우락부락하고, 좀 멋쩍고 가소롭긴 하지만 한 그루라고 불러 주는 것이 어울릴 듯하다.


6

'리그닌'이라는 물질을 가진 식물이 나무가 되는 현상을 목질화라 한다. 손톱으로 긁으면 그대로 벗겨질 만큼 겉이 부드럽고, 잎사귀와 별다르지 않은 녹색을 띠던 줄기가 어느 날 색이 변했다. 겉이 갈색이 되고, 그 갈색 표면은 조금씩 갈라지기도 했다. 가로수의 나무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변해버린 줄기는 손톱에 긁히지 않았다. 단단한 껍질을 가지게 된 식물은 겨우나기를 준비할 때도 걱정이 덜 되기 시작했다. 쉽게 꺾이지도 않았다. 다만 줄기 겉면에서 부드러움과 촉촉함을 느끼기는 어려워졌다. 조금 건조하고 단단하게 '나무'가 되어가는 것. 식물의 목질화.


7

식물이 목질화를 이루는 어떤 조건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하나가 바람이라고 한다. 식물이 바람을 맞고, 줄기가 흔들리고, 그 과정에서 줄기가 변하고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8

아기를 안고 재우는 시간, 멍하니 천장만 보는 것은 너무 아까워, 티브이를 켜고 영상을 보거나, 아기를 다독이지 않고 노는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붙잡고 웹소설 따위를 읽는다. 즐거운 시간이 잠깐, 배가 고프다.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입에 집어넣고 적당히 허기를 채우면, 아기에게 분유를 줄 시간이 되거나,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 빨래나 청소를 하고 싶다. 조금 실랑이하다 보면, 어머님께서 우리 집에 들어오시고, 곧 첫째를 하원시킬 시간이 다가온다. 다시 출발. 아직 하루의 반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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