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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그미 Jun 22. 2024

아들과 처음 떠난 여행(3)

너를 사랑한단다

1박 2일. 여행은 짧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산밖에 못 보는 내륙인이 바다를 즐기기에도 짧았고, 아이를 독점하게 된 서투른 엄마에게도 짧았다.

강릉 바다는 오묘했다. 옛 추억인지 뭔지, 오랫동안 떠오른 적 없는 옛 기억이 캡슐에 갇혔다가 나온 듯 머릿속을 채웠다. 그건 좀 심란했다.

 게다가 아이는 밤 내내 열로 끓었다. 체온계 없이 아이를 돌보느라 열에 대한 판단이 알쏭달쏭했다. 물 적신 수건으로 아이를 닦아주느라 밤잠을 설쳤다. 좋아하는 빵을 주었지만,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오랜만에 찾은 바다인데 해산물을 즐기지도 못했다. 그나마 강릉식 순두부, 막국수와 감자전을 먹어 강릉에 온 기분을 냈다는 점에 만족했다.

머무르는 여행은 아니었다. 강릉에 닿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는 듯한 여행이었다. 기차 시간에 맞춰야 해서 길을 재촉하다 보니 더 그랬다. 그럼에도 나는 좋았다. 완벽한 여행과는 참 거리가 멀지만, 일상을 잠시 벗어난 것이 좋았고, 그리던 바다를 보며 신산해지고 가라앉기를 반복한 것마저 좋았다. 아이와 함께해서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아이를 캐리어에 태우고 끌고 다녔는데, 아이가 군말 없이 캐리어에 앉아 버티는 것이 그렇게 기특하고 고마웠다. 아이 아빠가 보지 못했던 장면이다. 내가 처음으로 발견한 아이의 모습이다. 좋았다.

돌아오는 기차는 예상대로 아이가 버티기 힘들어했다. 이미 기차의 신기함을 느껴보았고, 제천에서 대전까지 무궁화호(만 다닌다)로 약 2시간이 걸린다. 28개월 아기가 두 시간을 앉아만 있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전날 밤 고열을 앓은 상태, 밥을 시원찮게 먹은 상태로 기차를 탄다. 아이는 좌석에 앉자마자 벗어나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좌석에 바르게 앉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영상을 보여주었다.... 최후의 수단이지만, 조금 빨리 썼다.


역에는 남편이 둘째를 안고 마중 나와 있었다. 땅이 부푸는 듯한 봄철 오후였다. 네 식구가 소제동으로 향했다. 카페의 마당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하룻밤만 떨어져도 그리운 내 둘째는 인형처럼 귀엽고, 나와 첫 기차여행을 마친 첫째는 아빠를 만나 반갑고 기쁜 기분으로 활달하게 돌아다녔다. 아이 아빠는 그 돌아다니는 아이의 등 뒤를 지켜줬다. 나무의 꽃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여봐란듯 피고, 의자에 등을 기대면 그 꽃과 나뭇잎이 드리운 아름다운 하늘이 보였다. 커피가 시원하고, 둘째 아이가 내 옆에 있다.


완벽한 여행 마무리였다.


그날 밤, 저녁을 또다시 먹는 둥 마는 둥하더니 큰아이의 몸이 펄펄 끓었다. 39, 40도를 오가는 체온계를 처음 보고 놀라 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일요일 밤 소아진료를 해 주는 병원을 급히 검색하고, 아이들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부르는 동안 마음이 마구 떨렸다. 까라진 몸에 눈에 초점도 없는 큰아이를 껴안고 무서워서 잠깐 울었다. 내가 데리고 다닌 것이 지나친 욕심이었던 걸까, 내가 돌봄이 아빠만큼, 할머니만큼 섬세하지 못해서, 병날 일을 막아주지 못하고 결국 아이를 당하게 하고 만 건가, 생각했다. 다시는 아이랑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까봐도 걱정했다.

"역시, 엄마와 뭘 하면 안 돼."

그런 생각이 '우리' 중 누구에게라도 자리 잡을까 봐 걱정했다.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고 싶은데.


아이는 중이염 진단을 받았다. 중이염이 그렇게 열을 앓게 하는 줄 이번에 알았다. 중이염이 그토록 오래 항생제를 먹어야 할 일인 줄을 이번에 알았다. 아이의 중이염은 6월이 깊은 지금까지도 치료가 지지부진하다. 가끔 며칠 휴지기를 둔 걸 빼고는 거의 한 계절을 항생제를 먹으며 지낸 셈이다.

어린이집에 처음 가는 올해, 잔병치레를 많이 할 것이라고, 들은 말이 많아서, 아이가 아플 것을 각오하기는 했지만, 하필 나와의 여행으로 병을 얻을 줄은 몰랐다. 아이가 새로 열을 앓을 때, 먹기 싫은 약을 억지로 먹으며 소리를 지르고 울 때, 나는 아이에게 조금 미안하다. 전적으로 내 탓이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아픈 것만 같은 기분에 마음이 좋지 않다.

하지만 아이는 씩씩하다. 열 날 때 빼고는 밥을 잘 먹는다. 싫어하긴 해도 약병이 보이면 체념했는지 어쨌는지, 받아먹기는 한다. 그리고 이제 기차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한번 경험했기 때문일까, 영상을 보아도 기차가 나오는 것을 고르고, 기차 그림을 보면 꼭 '엄마'라는 말을 한다. 어쩌면, 아이도 나와 다녀온 여행을 꽤나 즐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첫째 아이와 친해질 조금의 물꼬를 튼 것 같다. 내 머릿속 물꼬도 터진 것 같다. 아이에게, 다가가자.


많이 안아줄게, 앞으로 많이 같이 다니고, 많이 대화하자.

나도 표현하는 방법을, 특히 너에게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아. 엄마가 많이 부족했어. 그동안 미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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