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마도 짙은 그늘을 가졌다.
가정사는 문제없었으나 성장사는 문제가 없지 않았다. 십 대 초반에는 친구를 사귀지 못해 고생했다. 그전까지는 친구를 따로 사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줄을 몰랐다.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건 내가 미움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부터였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미움받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강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왜 사람들이 웃는지, 기분 좋은 웃음인지, 기분 나쁜 웃음인지, 이 사람의 농담은 왜 괜찮고, 저 사람의 농담은 왜 안 괜찮은지. 오늘 내가 한 말은 어땠는지, 농담이 통했는지, 친구들을 기분 좋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했다. 생각하고 생각해도 내가 생각지 못한 내 행동을 누군가는 싫어했다. 나는 누군가가 나의 행동, 나의 말, 나를, 싫어하는지에 오랫동안 주목했다. 사람을 의심했다. 조금만 화목하지 않아도 저 애는 나를 싫어하기 시작했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의 곁에 있어도 상관없는 아이였다가, 몇 년의 시간에 걸쳐 누구의 곁에도 쉽게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랬다. 나는 자의식이 제법 강한 아이였던 것 같다. 그렇게 지내도 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즘 정신건강을 위해 권하는 자기 암시들 말이다. 청소년기의 나는 나 자신에게 정말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잘했다.
나는 특별하고, 나는 잘할 수 있고, 나는 유익한 사람이다.
어쩌면 세계에 관한 관심보다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을지도. 그리고 지금도 그러할 지도.
나는 꽤 양지바른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정신은 음지에서 자랐다.
좀 같잖은 이야기인가? 더한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이 내 글을 읽다가 이쯤에서 집어치우고 있을까? 이 글은 결혼에 관한 에세이다.
음지 바른 환경에서 자라도 정신이 양지에 있는 사람이 있다. 어쨌거나 나는 '친구 사귀기가 어려워요'같은 고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늘이 느껴지는 사람이고, 나만의 심연을 하나 두고 있는 사람이다. 심연에 던질 것은 많았다.
MBTI가 유행해서 조금은 다행이다. 그 분석이나 밈 덕분에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INTP형인데, 정말이지 심연을 소유하기 딱 좋은 유형인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최대한 관찰하고, 대화하는 방법, 나를 드러내는 방법 등을 내가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에 따라 응용했다. 그런 식으로 제법 계산적인 사회화를 거쳤다.
여러 격언이 말하기보다 듣기를 우선하라고 조언한다. 나는 그래서 열심히 듣는 상대방이 되려고 애썼다. 하지만 대화를 할 때 일방적으로 듣기만 해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상대방은 자신에 대한 많은 정보를 털어놓았는데, 내가 나에 대한 정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공감도 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불안해진다.
"오늘 너에게 너무 많은 걸 말한 것 같아."
나는 그런 말로 끝나는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했던 아이와는 친구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상대방이 드러내는 만큼 내 것을 드러내야 대화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것을 먼저 드러내고 상대방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기다리는 새로운 대화의 전략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심연을 낱낱이 드러내진 않아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무도 그걸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가끔은 내가 얕은 심연에서 고민하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걸 들어주는 친구를 나는 몹시 좋아했다.
그땐 나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몰랐다.
그건 정말 나이가 들고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몇 주 전에도 다시 깨달았고.
몰랐기 때문에,
완전한 이해를 낭만으로 삼았다.
나는 연애다운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 내 심연을 이해해 주는 상대방에게 더 많은 마음을 쏟았다. 나는 그 연애에 내 영혼을 내놓았다고 생각했다. 영혼을 맡겨도 괜찮을 사람. 사랑하는 상대에게 그런 말을 바칠 수 있었다. 모든 이가 평생에 겪는 사랑이 첫사랑의 변주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내 여러 사랑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나는 '영혼을 맡겨도 될 것 같았던' 첫사랑 후에, 그 사랑이 준 것과 비슷한 것을 얻고 싶다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탐색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랬다. 그 당시에 내 머릿속에 '반드시 나의 영혼을, 나의 심연까지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야 해' 따위의 문장 같은 것은 없었지만, 깊은 이해를 받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의 내가, 나의 어둠을 보고도, 그것마저 예쁘다고 말해 줄 사람을 찾아서, 갈증을 가지고 지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의 비열함이나 치졸함이나 지질함이나 옹졸함 중에 무언가는, 한 모퉁이라도 내보이고, 그걸 포용해 주는 사람과 관계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연애라고 해서 매일 비열하고 치졸하고 지질하고 옹졸하지는 않았다. 그런 나를 데리고 하는 연애도 충분히 재미있고 유익하고 섹시하고 희망찼다. 시간이 흘렀다. 또 다른 어떤 연애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