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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그미 Jul 06. 2024

그는 내게 잠식되지 않아 (2)

심연을 응지에, 사랑을 양지에

나는 평생의 심연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아 헤매지는 않았다. 하지만 심연을 가진 나 자체를 사랑받고 싶긴 했다.

심연에 빠져 있는 나 자체도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사랑받았다. 충분히 깊이 이해받았지만, 결국엔 소용없었다. 난 매우 지랄 맞았다. 계의 양상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걸 바꾸고 싶어졌는데, 일을 그르쳤다. 그때 나는 허공을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손을 놓는 중이었는데, 나는 그걸 오해하고 장래를 향하여 더 긍정적인 것으로만 바꾸고 싶어 했다. 피식, 그때 나의 방만함과 도를 넘은 욕심을 생각하면 지금도 한심해서 웃음이 나온다. 오랜 시간을 들여 그를 단념했다. 좋아하는 데는 공이 들지 않는데, 단념하기 위해서는 정성과 공을 들여야 했다.


구렁텅이에서 나오지 못한 상태일 때, 또 다른 사람에게 구렁텅이에 빠진 나 자체를 보여주었다. 난, 구렁텅이 속에 있어. 이게 어떻게 생겨먹은 구렁텅이인지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반응을 기다렸다. 는 내가 빠져 있는 물속에 첨벙첨벙 들어왔다. 곧고 다부진 사람이었다.

구렁텅이에 같이 발을 담그고, 나한테 손을 뻗는 사람. 그를 만났고 그와 헤어졌다. 애감정의 참 자연스러운 흥망성쇠가 일어났다. 그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물에 발을 담그지 않고, 마른땅에 발 디딜 수 있었다.


좋은 것을 많이 배웠다. 타인이라는 세계에 접근할 수 있었던 그 기간 동안에. 나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조금은, 덜 생각하는 법도 배우기 시작했다.

관계를 정리하고 추스르는 시간 동안, 그간의 교훈을 정리하면서 내 나름대로 거듭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전까지는 내가 그저 외로웠다고만 생각했다. 나를 이해받고 싶어 했다는 것을, 정말 많이 이해받았다는 것을 그때 인정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느꼈던 환희, 모욕, 감사, 미안함, 희열과 죄책감을 곱씹었다. 난 혼자였고, 시간이 많았다. 정말 많은 아름다운 말들을 거쳐서 내가 여기까지 왔다. 여러 기억을 곱씹었다. 완전하진 않았지만 제법 해냈다. 혼자서 지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의 나약함을 위로해 줄, 나의 심연을 돌보는 벅찬 짐을 타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나 하나로도 괜찮기 위해 이제는 제대로 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짐을 했다.


나 자신의 다짐에 그다지 깊은 확신을 갖지는 않았지만, 시험할 기회는 꽤 빨리 왔다.

친구가 사람을 소개했다. 그때 만난 이가 지금의 남편이다. 그를 만났을 때 나도 내 심연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또한 심연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생각이 얕은 것은 아닌 듯했지만, 복잡한 것을 복잡한 상태로 그대로 두지 않고 최대한 간단하게, 단순하게 정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머릿속 서랍은 곧장 닫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분명하고 간단하다는 점이 부러웠다. 옆에 있으면 나의 생각도 그렇게 복잡다단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나와 동화되는 면이 없다는 점 때문에 그와 있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게 젖어들지 않으면 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정하던 지난날과 다르게 말이다.

이전의 상대방에게 내가 몸 담은 심연 속에 들어와 나를 안고 따뜻하게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다.

지금 나와 함께하는 상대방은 내가 심연에 들어가도 어항 밖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듯 나를 가만히 둔다. 내가 심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내가 들어가기 적당한 크기의 수조라는 사실은 그가 나를 가만히 두는 동안 나와 수조 사이에서 저절로 폭로된다. 나는 때로 내가 들어갔던 수조가 부끄럽다. 그러나 그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거나 작아지게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다만,

그다음 해야 할 일을 하게 한다.

순간에 충실하도록. 내가 뜬구름을 붙잡고 허공에 뜨지 않게, 오늘 살아야 하는 현실에 살게 나를 붙잡아 놓는다.


어떤 심연은, 그러니까 어떤 수조는, 이 사람을 만나기 전에 내 손으로 깼다. 거기에 들었던 물이 철철 흘러 내 마음이 늪이 된 시간이 있었다.

아니 원래 내가 늪인지도 모른다.


명리학을 공부하는 친구가 나와 남편의 사주를 봐준 적이 있다. 친구의 해석에 따르면, 나는 습한 흙이다. 지나치게 습해 자라는 식물의 뿌리를 썩게 만들 수도 있는 흙이다. 나의 남편은 아주 맑고 따뜻한 불인데, 그 불 덕분에 내 습한 흙의 물기가 적당히 말라서, 식물이 자랄 만 해진다고 한다.

나는 그 비유가, 명리학에서는 흔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부부에게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우리 남편의 현실 감각은 나 자신을 땅에 있게 해 준다. 그가 가진 에너지는 나라는 땅에 다른 무엇이 자라기 전에, 나부터, 땅에 뿌리 두게 해 준다. 그건 참 좋은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내 심연의 주소조차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게 서운하고 아쉬울 때가 있다.

그걸 이해받기 위해 사랑하고 결혼하는 게 아니었음에도, 그런 걸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기로 나 자신이 다짐했음에도, 때로는 나만을 파고드는 이해를 바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심하게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때도 있다. 그럴 때 그는 내 습기를 말려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둔한 사람, 무심한 사람이 된다. (내게 가뭄이 들어도 상관하지 않을 거냐고!)

마음은 천변만화한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는가? 마음은 매일 흔들린다. 그가 그런 사람이라서 좋은 날이 있고, 그런 사람이라서 싫은 날도 있다. 흔들리다 보면 결국 이 울타리에 그는 나와 함께 있다. 내 심연은 모르면서.

하지만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 심연을 다 내보일 때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을. 그래서 내 심연은 오로지 나만 돌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때로 못 이기는 술을 마시고 깊이 잠을 자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는 내 심연의 주소를 모른다. 그 주소조차 궁금해하지 않는다. 실체가 심연인지 수조인지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보는 나를 보고, 그가 만난 나를 알고, 그가 아는 나와 생을 함께하고 있다. 그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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