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짓고, 인사를 하는 것
우리가 잃어버린 것
만난 지 약 7개월 만에 우리는 결혼했다. 사고라도 친 거냐는 농을 꽤 들었다. 사계절은 겪어보고 결정하지 그러느냐는 말도 들었다. 사고 난 것 아니었고 그럴 만한 타이밍에 그럴싸한 상대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다정했고 나는 착했다. 손을 잡는 사이에서 몸을 섞는 사이가 될 때, 그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고 우리는 자주 눈을 마주쳤다. 그 눈을 보며 미소 짓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결혼하고서도 우리는 불화랄 것이 없었다. 사소한 것은 사소해서 싸울 필요가 없었고 사소하지 않은 것은 사소하지 않으니만큼 최대한 합의점을 찾았다. 우리는 절충안을 찾으면 그에 만족했다. 완벽을 탐내지 않아서 편안하게 한 쌍을 이룬 것 같다. 치약을 뚜껑 쪽에서 짜든 반대쪽에서 짜든 화가 나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짜든 안 나올 때까지 쓴다는 건 똑같지 않은가. 세탁이 끝난 빨래를 들고 나오면 함께 건조대에 널었다. 한쪽이 요리를 하면 상대 쪽이 설거지를 했다. 누구랄 것 없이 손이 놀거나 생각이 거기에 닿은 사람이 청소기를 돌렸다. 저녁을 먹고 나면 함께 한 시간 정도 갑천을 걸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밤에 녹였다. 남편은 그날의 외출이 모두 끝나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는 사람이고, 나는 돌아다니고 나면 집에서 씻을 힘을 충전할 때까지 누워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순서대로 씻고 베개를 베고 누우면 스마트폰 한 대로 유튜브를 같이 보았다. 결혼준비를 시작하던 날 머리를 맞대고 '유부녀의 탄생'이라는 웹툰을 보면서 웨딩산업의 소비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 함께 학습하던 때처럼 말이다.
누워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역할은 늘 남편이 맡았다. 가끔 손에서 힘이 빠져 그게 미끄러졌다. 미끄러진 전화기는 꼭 내 이마로 떨어졌다. 그건 진짜 아팠다. 남편은 깔깔 웃다가 웃음 끝머리에 미안하다고 말했다. 네 번 중에 한 번 정도는 그 웃음소리에 열받기도 했지만 그게 싸울 정도는 아니었다.
출근할 곳이 없어진 나는 집에서 몸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늦잠을 자곤 했다. 아침잠이 없고 성실한 남편은 일찍 출근했는데, 출근하면서 늘 내게 인사와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곤 했다. 잠에 취한 나를 깨울 때는 늘 쓰다듬거나 안아주었다. 다정한 아침. 오랫동안 아침을 싫어하던 나를 다정한 남편이 도와주었다. 주말이면 나는 더욱 늦게까지 자고 남편은 일찍부터 깨 게임에 몰두했다. 그러다 내가 깨면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하던 것을 정리하고 나를 안았다. 조용하고 포근한 신혼이었다.
나는 남편이 없는 동안 적게 일하고 오래 빈둥거리곤 했다. 사실, 혼자 살던 집에 남편이 들고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청소 주기가 바뀌고, 일상의 패턴이 바뀌었고 나만 건사하면 되던 게으른 생활감각이 빨리 변하지도 않았다. 빈둥거리다 남편이 퇴근할 시간에 맞추어 겨우 머리를 감고 양치질을 하고 저녁을 준비했다. 퇴근한 남편은 본인이 더 수고롭고 피곤한 하루를 보냈겠음에도, 집에서 내 게으름의 흔적이 느껴졌을 터인데도 나를 안거나 입 맞추며 오늘도 수고했다고 말해주곤 했다. 잠들기 직전에는 잘 자라는 인사를 서로에게 건넸다. 부부 사이에 예를 갖추라면 이보다 더하거나 덜할 필요가 없을, 인사와 다정함이 듬뿍 흘러넘치던 때였다.
아이를 가지고 맞벌이 부부가 되었다. 임신한 몸으로 일하는 내가 기약 없이 야근을 하면 남편은 주차장에서 기다려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고 남편은 운전을 하며 들어주었다. 일찍 끝나거나 주말이면 저녁을 먹고 함께 걸었다. 그때도 우리는 대화할 시간이 충분했다. 그때쯤엔 스마트폰 한 대를 두 사람이 보진 않았고 누워서 각자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럼 놀다 자, 잘 자.
우리는 각자의 취미를 즐길 수 있게 간격을 두었다. 만족스러웠다.
아기를 하나 낳고 우리의 대화는 풍성해졌다.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 육아 정보는 홍수처럼 쏟아지고 아기가 발달하듯 각자의 머릿속에 양육관이 발달했다. 자라는 아기의 모습, 생명의 신비, 인간의 경이. 그 시기 나는 한참 신입직원으로 이런저런 업무를 학습 겸 감당하고 있었다. 업무 스트레스를 하소연하는 것도 대화의 큰 축이었다. 이때 나는 결혼생활 중 가장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자식을 시어머니께 바치듯이 맡겨 놓고 푼돈에 일을 하고 다달이 돈이 부족해 허덕였다. 그건 나만 겪는 사정이었기 때문에 가정은 원만하게 굴러갔다. 이 시기에는 대화할 기회가 생기면 우리는 감춰둔 이야기보따리를 풀듯이 각자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각자 직장에서, 각자 아기를 볼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대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았다.
조금씩 인사하는 방법이 바뀌어 갔다. 아기에게 수면교육을 시켰어야 하는데, 실패했다. 아기와 애착이 잘 되어 있는 남편이 아기와 붙어 자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내가 둘째를 임신하면서부터 더욱 그랬다. 한 침대에서 잘 자라고 인사하는 날보다, 방문을 사이에 두고 잘 자라고 인사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침에는 아기와 남편이 내가 깨어나기 전에 집을 나섰다. 내가 잠결에 인기척을 느끼고 잠을 깨면 남편이 더 자라고 다독이며 방문에서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나는 남편이 아기를 데리고 현관문을 닫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 사이에는 인사가 있었다.
-잘 다녀와.
-응, 더 자고, 이따 잘 다녀와.
사실 결혼 전에 나는, 그러리라 생각했었다. 아이를 낳더라도 아이보다 남편에게 먼저 인사하는 아내가 되리라. 남편에게도 아이보다 나에게 먼저 인사해 달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한 번도 그 말을 해 보지 못했고, 나도, 남편도, 인사의 순서 같은 것을 헤아려 가며 순간을 살지 못했다. 퇴근을 시댁으로 하면서, 부부간의 인사는 더 담백해졌다. 인사는 아이를 먼저 향하게 되었다. 부부간의 퇴근 인사는 결국
-왔어?
-응.
이 되었다.
어떤 각오는 참 쉽게 허물어진다. 편리하게도.
둘째를 낳고 우리 부부는 아예 떨어져 자게 되었다. 남편은 아들과, 나는 딸과 잔다. 각자 재워야 할 아기가 있다 보니, 아기를 재우러 들어가면서 인사를 나누지 않으면 서로 까무룩 잠들어 그날 하루의 대화도, 인사도 끝나고 만다. 인사를 챙기지 않은 지 벌써 몇 달이 되었다. 이따금 의식적으로 인사를 나눈다. 마치 내가 둘째 아이인 것처럼, 딸아이의 손을 내가 흔들며,
-아빠, 오빠, 잘 자.
그러면 남편이 잘 자라고 손을 흔든다.
둘째 이름만 부르며 잘 자라고 한다.
-엄마도 잘 자.
이렇게 해주지.
-사랑해.
가끔 덧붙여주지.
아빠와 노는 것을 좋아하는 첫째는 아빠가 출근할 때마다 눈물바람이다. 그 상황을 피하고자 남편은 출근 시간을 더욱 앞당겼다. 이미 여섯 시 반이면 늦었다며 길을 나서던 사람이다. 이제는 다섯 시 반, 심지어는 다섯 시에 길을 나선다. 나는 당연히 잠에 들어 있는 시간. 출근 전에 방문을 빠꼼 열고 눈으로라도 인사를 건네던 남편이 이제는 현관문 소리도 조심하며 떠난다. 남편이 사라진 아침, 첫째는 아빠를 찾아 울며 아침을 열고, 둘째는 첫째가 우는 소리에 깨니까 운다. 인사가 사라진 아침, 아니 요란한 인사로 시작하는 아침. 남편과 나누던 조용한 인사가 그립기도 한, 그런 아침이다.
엊그제는 남편이 야근을 했다. 나는 용케도 남편이 오기 전에 아이 둘을 모두 재웠다. 더욱 용한 것은 아이들을 재우고도 나는 깨어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들과 함께 잠들기가 훨씬 쉬운데 말이다. 덕분에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태블릿을 열고 글을 썼고, 남편은 씻고 잘 준비를 했다. 그가 오랜만에 나에게
-놀다 잘 거야?
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그럼 놀다 자.
라며 손을 흔든다. 나를 바라보면서.
마주 바라보며 이런 인사를 나눈 게 언제였더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눈 밤, 우리에게 시간과 체력이 조금만, 눈을 마주 보며 인사를 나눌 수 있을 만큼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산다고 해도 아침에 만나고, 헤어졌다가, 밤에 다시 잠깐 만나고, 또 헤어지는데.
오랜만에 내 눈을 보며 잘 자라는 말을 건네던 그는,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