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시부모님께 뭐라고 말했기에, 내게 오던 잦은 연락도, 틈만 나면 이루어지던 방문도 모두 사라지고, 내가 원하던 간격이 생긴 것일까.
알고 싶지 않지만 짐작은 간다. '아들 이혼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같은 종류의 말을 했을 것 같다. 그는 틀이 좋은 사람이다. 좋은 아들이고, 성실한 직업인이고, 선량한 보통의 시민이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런 만큼 부모님을 극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역할 갈등을 겪었는데, 그는 좋은 남편이기도 하기 때문에, 아마 역할 사이에 느끼는 괴리감만큼 위악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때때로 충격적이거나 서운할 수 있는 표현을, 서슴없이 쓰기도 하는, 약간은 심술궂은 사람이기도 하니까. 늘 남에게 맞춰주고 온화한 그가 입장을 관철하고 싶을 때, 단호해지고 싶을 때 그런 식으로 말하기도 하니까.
관계에는 관성이 붙는다. 시간에 따라 흙 위를 지나는 물 같기도 해서, 관계의 물줄기를 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위해서 분노하고, 침묵해서, 물꼬를 새롭게 텄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가족이 변했다. 남편은 어머님의 도움이 없는 우리 가족 속에서 더 바빠지고 더 피곤해졌다. 그의 그런 수고를 나는 원했나?
그렇다. 나는 이런 삶의 쓴맛이 우리 둘만의 것이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가 나와 함께 수고하는 것이 좋다. 어린이집에서 나눈 대화, 내가 겪은 만남, 각종 대소사, 망가진 가구, 버려야 하는 음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남편과 할 수 있어서 좋다. 삶을 함께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이런 것을 함께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내가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는지, 어머님과 결혼생활을 하는지 헷갈리지 않다. 그의 피곤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연민하고 공감할 수 있어서, 내가 그와 진정한 부부라고 생각한다.
우려가 없지는 않다. 어떤 기분으로 연락을 줄이셨을지, 시부모님의 기분을 생각할 필요도 있다. 그가 내 친정 식구들과 가족이 된 것만큼이나, 나 역시 그래야 하므로. 그러나 아직은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감정도 관성이 붙는 것 같다. 참아라 참겠노라 하면 계속 참아지고, 못 참겠노라 안 참겠노라 하면 안 참아진다. 나 역시 새로운 좌표에 서야 한다. 간격을 유지하며, 상처를 주고받지 않을 어느 한 지점을 찾아야 하겠지.
다른 우려도 조금 있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기계적으로 내 말만을 따르려 하는 것 같다. 어떤 의견차가 생기든 결국 내 뜻대로 될 거라는 암담한 암시 같은 걸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러다 또다시 나에게 '네가 선택한 대로 했잖아. 왜 그래?'라고 말할까 봐 나 역시 마음의 꺼림이 있다. 나는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의 생각과 내 생각이 융합해 우리의 세계가 만들어지기를 바랐다. 지금도 그것을 바란다. 이제는 그런 과정을 겪고 있다.
남편은 참을성이 많은 편이다. 아이를 가르칠 때, 윽박지르거나 목소리를 높이고 고함을 치기도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올바른 말이다. 나 역시 반드시 그것만이 아이를 가르칠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가 좋아하는 어른들이, 아이와 사랑을 주고받는 어른들이, 아닌 것에는 아닌 거라고 단호하게 반응하기를 바랐다. 남편이 나를 이해한 뒤, 그는 단호해졌다. 그런데 좀 조급하게 구는 면이 있다. 세 번 정도 경고를 한 뒤에 단호해져도 좋을 것 같은데, 으름장 한두 번 후에 바로 아이를 데리고 간다. 그럴 때는 내가 남편을 괜히 부추겼나, 그런 생각도 든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부부가 마땅히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어떤 말에도 심상하게 굴던 그가 이번에는 심상치 않게 굴고, 많이 바뀌었다. 이 관계의 끈을 나는 툭 떨어뜨리고 놓으려고 했었는데, 그는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감정적으로 땅을 파도, 새로운 심연을 열고 거기를 드나들어도, 전혀 영향받지 않는다는 점이 그와 내가 함께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는 나와 인생을 함께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에 따라 결혼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다. 자신의 인생에 이혼은 없다는 강한 신념, 자기 자신은 좋은 사람이며 남편으로서도, 아빠로서도 좋은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그에게는 있다(긍지와 자기 확신을 잃고 심연밖에 끌어안은 것이 없던 나에 비해 아주 밝고 씩씩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의지했고 그는 나를 그의 삶에 끌어당겼다. 그가 관계를 지키기 위해 보이는 집념이, 내게는 퍽 인상적이다. 지금도 그는 그의 확신과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살고 있다. 그는, 우리 가족의 중력이다.
로버트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 속에서 나의 사랑을 설명한다면, 그에게 내가 보내는 사랑은 우애적 사랑이다. 친밀감과 헌신을 두터운 토대로 삼고, 열정이 오락가락하며 내 삼각형의 형태를 바꾼다. 대화가 빈약해 몸에 매달리던 기간이 나는 처연하게 느껴져서 여태껏 슬프다. 그는 내가 왕성한 성욕을 가지고, 욕망과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겠지만, 나는 속내가 복잡해서 그렇게 달려들었었다. 그걸 몰라준 건 서운하지 않는데, 내 마음을 외면하고 남편에게 몸을 감고 들었던 나 자신이 조금 배알이 없는 치처럼 여겨지고 해서, 입맛이 돋아나지 않는다. 지금 나의 사랑의 삼각형은 열정을 많이 줄인 둔각삼각형이다.
우애적 사랑을 동반자적 사랑이라고도 부른다. 우리 부부는 인생을 두고 동업하는 사이로 볼 땐 썩 좋은 조합이다. 분업과 협동이 잘 된다. 특히 아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이 호흡이 잘 맞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나는 아직 동반자로 지낼 수 있다. 꽤 괜찮은 가정을 가꿀 수 있을 것이다.
내 삼각형이 기다란 둔각삼각형이 되었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그래서 손끝도 쉬이 스치지 않던 몇 주가 흐른 뒤, 어느 날 식은땀을 흘리면서 나에게 뽀뽀라도 하자고 했다. 그가 첫 연애를 할 때 아무리 숙맥이었더라도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 같다, 싶을 정도로 서투르고 멋없고 뻣뻣한 제안이었다.
어떤 정사는 평소에 주고받는 사랑만으로는 서로를 향한 갈증이 채워지지 않아서,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이루어지고, 어떤 정사는 그 절정인 중에도 상대를 더 갖지 못해 한스러운 갈망을 남기기도 한다. 어떤 정사는 본인의 욕구를 위해 상대를 소비하기도 하고, 어떤 정사는 두 사람 모두에게 남는 것 없이 몸만 쓰고 주저앉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정사는 말 한마디 필요 없을 정도로 빠르게 완전한 화해와 이해를 이루어내기도 하고, 어떤 정사는 서로에게 차리는 마지막 예우나 베푸는 자비가 되기도 한다. 어떤 정사는, 화해의 미진한 한 점을 화룡점정처럼 채우는, 좋은 마무리가 될 수도 있다.
정사를 이루는 것들을 사랑의 삼각형처럼 3요소로 포착하고, 그 사이에 정사의 좌표를 찍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어디쯤인지를 짚으면서 이건 이거다, 아니다를 생각하면서 더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 그만 생각하고 싶다.
그는 여전히 나와 함께 늙고 싶다고 말했다. 역시, 그는 이 관계의 중력이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저 힘이 다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같이 늙어 있겠지. 나는 그것이 의심스럽지만, 그는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의심과 의지 중에, 어느 쪽에 시간이 편을 들 것인지, 아마 계속 지켜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