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라며 늙는다. 나는 사람이고 그 명제에서 벗어날 바 없다. 벗어날 이유가 없고, 그럴 이치도 없다.
친구란 어떤 존재일까? 학교에 다닐 적에도 같은 반이면 친구,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면 친구라 부르던 명랑한 이들과 달리 나는 아무에게나 친구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전을 펼쳐-그때는 사전을 펼쳤다. 지금은 검색하지만- 친구라는 말을 찾아보면 '오래 두고 사귄 친한 벗'이라고 했다. '벗'이라는 단어는 점점 드물게 쓰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벗을 벗이라 부르고, 오래 두고 사귄 벗을 그중에 가려 친구라고 부르기 위해 굳이 친구라는 말을 참고 버텼다. 내가 그렇게 미련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리고 오래도록 아낀 친구라 하더라도 대화하다 보면 느끼게 된다. 오래 두고 사귀어 그 시간이 길고 소중했던 만큼, 우리는 다른 길을 걸으며 나이 들어왔고, 그렇기 때문에 허물 수 없는 벽 역시 조금씩 생긴다. 이 친구를 만났기 때문에 허물 수 있었던 벽이 있었고, 이 친구와 친하기 때문에 쌓인 벽이 있다.
나는 그 벽과 벽 사이 쌓인 인연이, 형태 없이 기이하게도 계속되는 마음의 교통이 늘 신비하다. 그럼에도 그 벽을 두고 대화를 하다가, 어느 날 나는 친구와 나 사이에 선 벽에 창문을 닫아걸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함께 나이 먹어 온 시간이라기엔, 너무나 각자의 갈 길을 걸어온 시간이라, 어쩐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또래 친구라 해도 우리 삶의 자리는 각자 너무나 다르다. 다른 직장, 다른 가정, 다른 일상, 다른 취미, 다른 취향, 다른 소비. 때때로 생각한다. 이렇게 나이 든 너와 내가 타인인 채로 지금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그토록 오랜 친구로 지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같음보다 다름으로 더 많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날이면 나이를 먹었구나, 싶다.
친구 역시 내가 오랫동안 집착했던 대상이었던 게다. 어쩌면 사랑만큼이나.
다름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더 많이 얻게 되는 것, 그런 걸 조금은 성숙함에 가까운 것이라고 여겨도 될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나이 들어간다는 말속에 숨기는, 친구와의 거리감에 슬퍼지는 기분을 조금 달콤하게 즐길 수도 있다.
얼마 전, 하나뿐인 여동생의 결혼식을 하루 앞둔 저녁, 불현듯 남편의 넥타이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퇴근하다 백화점에 들렀다.
남편이 가진 중 가장 잘 어울리던 넥타이는 빨간색과 파란색이 교차하는 것이었는데, 30대 접어들던 즈음에만 해도 잘 어울리던 그 넥타이는 요즘 들어 어쩐지 어수룩해 보이고 뭔가 가벼워 보인다.
내가 남성 복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도 덜 예쁘다는 게 보인다. 그 부족한 인상을 새 넥타이로 바꿔보고자 한다.
붉은색을 은근히 좋아하는 그의 취향을 고려하여, 어두운 빨강에 차분한 장식이 있는 것을 골랐다.
남편은 그걸 보고 고맙다거나 하는 빈말도 없이 포장만 벗기고 놓아둔다. 아이를 돌보는 게 먼저라는 핑계 아닌 핑계다. 마음에 들었다면 목에라도 대 볼 것인데, 돈 쓴 보람 없게 왜 저런담. 한 마디 해 보자 대답이 돌아오긴 한다.
-아저씨 같은데? 나이 들어 보여.
-그럼, 아저씨지. 내일모레면 마흔인데.
-일단 내일 셔츠에 둘러보고. 그럼 알겠지.
뚱한 대화에 사준 생색도 못 내보았는데, 다음 날 아침 넥타이를 매고 거울 앞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니 넥타이와 남편은 전혀 이질감이 없이 어울린다.
-나이 들었구먼, 뭘!
어울린다는 말은 조금이라도 긍정적이고 칭찬인 것 같아, 그 말은 들려주기 싫고, 조금 괘씸했던 감정을 담아 일갈했다.
우리는 서로의 소년과 소녀를 발견할 수 있어서 결혼하긴 했지만, 그래도 냉정하게 말하면, 이제 중후한 넥타이가 어울리는 시기가 되었다.
결혼식에 가면 명절보다 더 많은 친척들을 만날 수 있다. 데면데면하게 자라 온 사촌들도 이제는 만나면 서로의 아이가 몇 살인지 묻고, 더러는 용돈을 챙겨 준다. 어른들은 이제 나를 잘 못 알아보신다. 내 이름을 다시 소개해야 알아보신다. 내 옆에 있는 아기를 보고 으레 '네 애야?'라고 눈치를 채고 인사와 용돈을 건네주신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이런 게 끈끈한 정이구나 싶다. 그 정도 안부가 오가는 짧은 대화만으로 우리는 삶의 한 지점에서 충분한 인사를 나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여전히 건강하신 아버지의 형제들이, 그 어르신들이 계심이 다행스럽고 반갑다. 나는 어려서는 낯가림이 심한 아이였고, 자라면서는 숫기없이 조용하기만 한 애였는데, 이제는 어른들과 눈을 마주치면 먼저 다가가며 '잘 지내셨어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제 아기예요!'라고 떠들고, 인사한다. 퍽 씩씩해졌다.
사촌과 나, 우리 대가 낳은 아이들은 지금이 한창 어릴 때다. 어린아이들은 명절 한두 번, 경조사 한두 번 사이에 훌쩍 큰다. 기어 다니던 아이는 종알종알 떠들고, 나를 만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나만 그를 만난 순간을 기억하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너랑 언니한테 내가 용돈을 줬는데, 넌 돈이 뭔지도 모르면서 손에 딱 잡더라.
-언니는요?
-언니는 바닥에 던지더라고.
-이제는 안 그럴 걸요!
다음에 만나면 또 쑥쑥 자라 있을 테지. 나는 '네가 이제 몇 살이니?'라고 묻고 '벌써? 정말 많이 컸구나!'라고 감탄할 것이 틀림없다. 예견할 수 있는 미래지만 지루하지 않다. 아이들이 자라는 일이니까.
내가 옛날 어른들이 하던 것처럼 말하고, 어른들이 이런 걸 느꼈을까 속으로 짚어 보면서, 내가 정말 누군가의 어른으로 살고 있구나를 느낀다. 아이들에게 줄 용돈을 준비했지만, 내가 가져간 지폐는 적고 아이들은 너무 많아서, 봉투를 열지도 못한 채 다시 들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다짐한다. 다음번에는 지폐를 여러 장 준비해야지.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아무 거나 걸치고 발라도 예쁜 나이는 지났다. 마음이 가라앉는 만큼 삶에 무게감을 더할 필요가 느껴진다. 워워, 급하게 할 것 없이 국밥에 다대기 넣듯이 조금씩만 하자.
격식 갖춘 자리에서는 조금 무게감이 느껴지는 넥타이, 도금한 액세서리보단 제련한 금 주얼리를 걸쳐야 마음이 놓인다. 콜라겐은 돈 주고 사 먹어야 한다. 밀크씨슬은 워킹맘의 주요 도핑 약물이다. 아이크림을 바르면 비립종이 난다고 기피하던 시기는 지났다. 밤마다 무조건 듬뿍듬뿍 얼굴에 뭔가를 자꾸 찍어 바른다. 정수리에 향수를 안 뿌리고 출근하면 살짝 불안해진다. 아무리 씻어도 내 체취가 향기로울 자신이 없다. 용돈 받을 기대가 아니라 줄 각오를 하며 봉투를 준비해야 한다. 그런 용돈을 내밀기 위해 내 용돈을 미리미리 아껴둬야 한다.
어른이 되면서, 생애라는 물길을 항해하면서, 일상을 위해 갖춰야 하는 물건이 점점 늘어난다. 자꾸만 상품의 용도에 새로이 눈을 뜬다. 그 무엇에 대해서도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실감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좀 섣부르게 나이들 각오를 다지는 면도 없진 않겠다. 그래도 지금 꽤나 바지런하게 나이 먹는 중이다. 때때로 마흔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자꾸 이것저것 연연하게 된다. 한편으론 이런저런 사물에 연연하면서 나에 관하여 조금씩 내려놓고 있다. 반드시 생기 있고 발랄하기만 하고 싱그러운 어떤 것을 보존하려 하기보다는 조금 처지고 순해지고 건조하며 쪼글거리는 것을 인정한다. 살짝, 아주 스리슬쩍, 구렁이 담 넘듯이 능글맞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나는 슬슬 나이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