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직한 10월 하순은 의회 제출 자료 준비로 바쁜 시기였다. 행정사무감사(줄여서 행감)가 코앞에 있었다. 그나마 행감자료는 얼추 작성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여유로운 느낌이 있었다. 직원들은 국장님 지시에 따라 각자의 소관업무에 대한 행감 참고자료를 보충하고 있었다. 국장님이 그 자료를 들고 의회에 출석할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정례회 의사일정에 맞춰 올해 추가경정예산과 내년도 본예산 자료를 동시에 작성하고 있었다.
행정감사와 예산심의를 하는 정례회가 연속되는 가을, 우리 관청은 출판사가 된다. 불과 두 달 사이에 행감자료, 국장님용 행감 참고자료, 추가경정예산안, 본예산안, 각 예산에 대한 사업명세서, 각 사업명세서에 관한 국장님용 참고자료를 작성한다. 예산안은 일반회계, 특별회계, 기금에 따라 각기 제본된다. 해당하는 경우에는, 성인지예산서도 작성한다. 자료작성의 관점에서 공무원은 있는 정보와 자료를 워드프로세서로 매일 다르게 가공하는 정보유통 노동자에 불과하다(비록 공무원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는 아니지만). 나는 우리를 문서공장의 문서공이라고 농담하기도 한다(웃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때때로 제본은 새벽에도 이루어진다.
국장님은 의회에 출석하고, 의회의 질문에 답하셔야 한다. 의회 준비로 국 내의 업무내용을 공부하시는 동안 국장님은 바빴다. 국의 모든 직원도 바빴다.
국장님은 국 내의 모든 업무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면서 현안보고를 간간이 받아야 하고, 대외 행사와 위원회, 회의에도 참여하시므로 바빴다. 직원들은 시장님, 국장님, 혹은 과장님이 참석하는 회의와 행사를 준비하고, 업무 관련 출장을 다녀오고 본인이 담당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들어오는 공문을 접수하고 나가는 공문을 작성하느라-이런 것들이 공무원의 고유업무다- 바쁘고, 그 와중에 의회에 대비한 자료를 작성하느라 바빴다.
아, 국장님 일정관리라는 보직은 이럴 때 몹시 빛난다. 나는 의회에 제출할 자료가 없고, 그래서 저 오가는 메신저로부터 한결 자유로운 신세이기 때문이다.
각 직원들의 메신저와 머리통은 터져나갈 지경이 된다. 비슷하게 생긴 파일들이 이건 추경, 이건 본예산, 이건 추경 수정본, 이건 본예산 2차 수정본 공람, 이건 추경 참고자료, 저건 본예산 참고자료, 제목도 비슷하게 생겨서는 영판 다른 내용을 취급해야 하는 것들이라 처음 일할 땐 구분하는 것부터 힘들었다. (참고로, 이런 자료의 종류에 대해서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고 일단 파일을 던지고 작성하라고 한다. 그것이 우리 공직의 '문화'다!) 자료의 종류가 너무나 헷갈리고,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내용을 적고, 적다가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데 메신저 서버를 타고 이 파일 저 파일이 바쁘게도 오간다. 휴직 전 자료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작성하다가 서무한테 혼나던 기억이, 복직하니 되살아났다. 으악!
그것이 공무원의 가을이다. 청사의 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것은 누군가 야근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느 상업건물이나 그럴 테다. 그들이 도시의 야경을 수놓는다. 야경의 불빛이 누군가의 야근이라고 생각하면 야경을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까, 당신이 퇴근하고 집에 앉아 있다면 야경을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리라.
아버님은 육아시간을 쓴다는 나를 한사코 말리고 싶어 하셨다. 복직 직전의 주말, 시댁에 건너와 밥을 먹자는 아버님의 제안에는 묘한 인력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식사 후 나를 따로 불러 카페에 데려가셨다. 이날은 남편을 만난 이래 처음으로 시아버지와 단둘이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신 날이 되었다.
40년 간 공무원 생활을 하다 퇴직하신 아버님은 성실하고 진실된 자세로 복무했던 분이시다. 오랜 근무기간에 걸맞게 다양한 보직을 경험하셨고, 그중에 비서직을 수행한 경험 또한 있으신 터라, 내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셨다. 비서 업무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더불어, 왜 비서의 늦은 출근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기시는지도 말씀하셨다.
중요한 보고나 회의는 늘 이른 아침에 이루어지는데, 의중에 손발을 맞춰야 하는 비서가 그 시간에 없다면 어떤 상황이 되겠느냐. 오명을 쓰고 보직을 벗어나게 될까 봐 우려된다.
아버님은 밤에 잠을 못 이루셨다고 할 정도로 내 공무원 생활을 진심으로 걱정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를 비서로 쓰신다고 판단한 국장님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육아시간을 써야 하는 직원에게 이 바쁜 계절에 단위업무를 맡기는 것보다 비서 업무를 맡기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하신 것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아니야, 아가. 내 말 믿으렴.
아버님은 나에게, 이번에는 제도의 혜택을 입으려는 생각을 접어 두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일에 전념해도 아이들을 정성으로 돌봐 줄 어머님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공무원 생활에 관한 아버님의 조언은 대부분 좋았기 때문에 이제껏 귀담아들었고, 때때로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버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직장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아기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는데, 그걸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로서의 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매일 직원이어야 하지만 매일 엄마이기도 하고, 제도가 그것을 이제 뒷받침해 주고, 아량을 베풀고 이해와 격려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이제 풍습을 바꾸려 하고 있건만, 이 흐름을 굳이 역행하고 직장에서 내 가정을 초월해 가며 헌신적인 근무쟁이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있다는 다행스러운 사정을 발판 삼아 직장에만 전념하여 승승장구하는 무용담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합리적인 선에서 1인분의 몫을 해내는 직원으로, 저녁마다 아이들 곁에 있는 엄마로 살 것이다.
그리하여 복직 첫 주부터 나는 마음껏 육아시간을 활용했다. 아침에는 아이들을 등원시키느라 30분 늦게 출근하고, 오후에는 하원한 아이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1시간 30분 일찍 퇴근했다. 이렇다 할 일이 있으면 5시에 퇴근했다. 국장님도 5시 무렵이 되면 나더러 어서 퇴근하라고 격려하셨다.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때때로 높은 분의 이상적인 발언은 실제 현상과 거리를 두기도 하는 법. 내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 내 전임자이자 현 대직자인 동료가 본인의 일거리를 싸들고 내 자리로 건너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닌가? 국장실에 직원들이 드나드는데, 그 앞을 지킬 비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았는지 동료들이 내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곤 했다. 첫 주에 나는 매일 출근 인사로 '주사님(6급 이하 공무원끼리 서로를 올려 부르는 호칭), 미안해요' 혹은 '주사님, 감사해요'를 입에 달고 다녔다. 2주 동안을 그렇게 지내며, 나는 스스로 세운 기준인 '합리적인 1인분의 직원'도 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괴로워졌다.
3주 차부터는 퇴근을 원래대로 6시로 늦췄다. 아침은 도저히 안되어 30분 육아시간을 계속 쓴다.
큰애가 일주일에 두 번 언어치료를 받으러 센터에 가야 한다. 아이 둘을 하원시키고 간식을 챙기고 놀아주고 손이며 입이며 닦아준 뒤 치료센터에 데려가는 일을, 시어머니께서 맡아 주신다.
기꺼이 해 주시기는 하나, 나는 마냥 기꺼울 수가 없다. 감사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면목 없기도 하다.
예산 심사는 중요하다. 어느 조직이나 돈 안 중요한 곳은 없다. 비영리법인이라도 돈 없이 안 굴러간다. 그러므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예산심의는 공무원들이 당연히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이다.
그날은 올해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심사하는 날이었다. 본예산은 며칠에 걸쳐 상임위 기준으로 나누어 예산안을 심사하지만, 양이 적은 편이라 2차 추경은 하루 내에 전부 심사하고 의결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예산 심의는 아주 중요하다. 그 의미의 무게도 있지만, 그로부터 비롯하여, 심의하는 날 어떤 질문이 나오느냐, 출석한 국장님과 과장님이 얼마나 잘 답변하냐, 의원이 보충설명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예산액이 달라질 수 있다. 심의 후 소명까지 필요한 대상이 되면 실무자들은 난리가 난다. 액수에 의구심을 품은 의원(들)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더 많은 자료를 부랴부랴 준비한다. 사업비가 줄어들거나 사업 자체가 사라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데드라인은 실시간으로 정해진다. 1시간, 혹은 2시간 안에 자료 준비! 의원실 앞에서 소명 대기! 피 말리고 손 떨리기 딱 좋은 긴장감이다. 소명목록이 길수록 직원들은 더 많이 한숨 쉰다. 그건 의결이 더 멀어진다는 뜻이고, 의결이 멀어지면 퇴근도 멀어지고, 하루의 행복도 얼마큼은 작아진다는 뜻이다.
요즘은 의결까지 전 직원이 사무실에 앉아 무한히 대기할 정도는 아니다. 허나 적어도 심의 중에는 누구 담당업무가 언급될지 모르기 때문에 퇴근할 수 없다. 하필 그날이 그랬다. 오전에 운영위원회, 행정자치위원회 소관 업무 정도는 마치고 점심을 먹겠거니 했다. 다음 순서는 복지환경위원회, 교육위원회, 산업건설위원회. 어쩐 일인지 정회를 선언할 때 위원장께서는 점심을 먹고 행자위 심의를 계속한다고 말했다. 아직 안 끝났냐고 말하고 싶어 하는 행자위 소관부서 직원들의 벙찐 표정은 의회 인터넷방송을 타고 내 모니터에 전해졌다. 좋지 않은 예감이 사무실을 스쳤다.
2시 30분, 느긋하게 시작된 오후 심의. 복환위는 3시 25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그쯤 되자 눈치가 느린 나도 알게 되었다. 가장 마지막 순번인 우리 국은, 정시에 퇴근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걸. 교육위원회가 4시 50분에 시작되는 걸 지켜보며,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직원들은 정시퇴근을 이미 포기하고 저녁식사를 위한 정회 후에도 심의가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심의만이라도 저녁 전에는 끝날 것인가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결국 산건위가 시작될 무렵, 내가 챙겨드려야 하는 국장님과, 나와 같은 부서에서 실무를 하는 직원들이 팽팽하게 일하는 가운데, 나는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 6시 퇴근도 늦은 상황이었다. 남편이 저녁에 집을 비워야 해서 내가 아이들을 돌보러 빨리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해야만 집을 나설 수 있는 남편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내가 보좌해야 할 국장님에게는 오늘 저녁의 의회 일정이 창창하게 남은 상황에서, 나는 집을 향한 걸음을 재촉했다.
의원들은 의원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행정청의 직원들은 맡은 바 최선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만 열심히 주어진 역할을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어딘지 떨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일찍 퇴근해서 남편이라도 마음 놓고 집을 나설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뿌듯했을까? 남편의 일을 희생시켜 사무실에 남는 것이 뿌듯했을까? 모두가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보람을 느낄 것 같은데, 나만 그런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것 같은 퇴근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