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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쇼 Feb 02. 2023

사랑은 부족한 사람들과 만나는 것

#교회 #불교 #법화림 #사랑 #미움 #감정

내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은 대부분 50대가 많다. 그쯤되면 사회생활, 가정생활을 하다 경험치가 쌓여 포용력과 느슨해지는 여유가 생기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견고한 자기만의 수학 공식 같은게 생긴다. 그 공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대화하거나 일하다가 서로 마음의 상해를 입는다. 관계의 교통 사고가 생긴다. 그런데도 내 돈 내며 만나고 밥먹고 논다. 싫지만 다른 것을 얻기 때문에 같은 공간으로 모이고 귀가한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을 주고 받으며 미주알, 고주알 입을 턴다. 한번은 장례식장에 모였는데 내가 사이다 한 병을 따서 마셨다. 옆에 있던 교인 중 한 사람이 그게 못마땅해서 '그걸 여기서....'라며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의 기준에서 비싼 음료수를 굳이 마셔야 하냐 였다. 현상은 이렇지만 속내는 예전부터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내가 한 말 때문에 기분이 나빠 있던 상태여서 다른 행동에 화를 낸 것이다. 교회에 재정을 맡은 어른 한분이 계신데  그 일이 너무 힘들다고 토로를 했다. 다른 교인이 '그럼 하지 마세요'라고 해서 화가 났다. 그 얘기를 다른 교인들에게 했다. '서운하셨겠어요' 위로의 한마디를 해주면 되는데 들은 사람들이 편을 들 수도, 맞장구를 칠 수도 없었다. 화가 난 그분도 예전부터 그를 싫어하고 못마땅했기 때문에 화가 나고 분노가 생겼다. 더 안 좋은 얘기를 친한 사람이 하면 해맑게 웃으며 넘기는 분인데 관계에 따라 별 일 아니고 큰 일이 되고 한다. 이런 자질구레한 말과 행동의 부딪힘은 개개인의 성격이나 행동이 왜 그런지 이해하고 되고 알아가는 과정을 밟는다. 특히 어린시절과 맞닿는데 세상에 태어난지 몇 년 안된 아이들이 어른들의 양육 태도에 정서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성장하면서 일과 결혼, 자녀 양육, 남편, 시댁, 부인, 처가식구들과 관계로 변형되고 왜곡되는 성격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다른 공간, 다른 시간과 경험을 보낸 사람들이 만나다보니 기분이 나쁘고 좋고 웃기고 슬프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30년 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 친정엄마는 정신분열증으로 40년째 약을 드신다. 엄마의 장애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고 타인과 관계는 물론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들이 시달렸다. 그런 엄마를 둔 내가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집에서 자란 사람과 경쟁력이 떨어진다. 누군가의 말에  쉽게 상처를 받고 남 탓을 한다. 내 표현을 못하고 눈치를 본다. 이런 자신이 싫어서 반대 급부로 간다. 공격적이고 단정적인 말로 과도하게 폐부를 찌른다. 유연함과 관대함이 떨어지고 남들의 잘못된 행동에 못된 말을 한다. 좋은 면은 엄마의 병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아픈 사람에 대한 이해와 측은지심이 있다. 거부하고 피하기보다 다가서게 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정신적으로 감기를 앓고 있을까 싶고 엄마 생각이 난다. 한번은 교회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청년이 왔다. 그는 자기가 속한 집단을 와해시키는 전문가였다. 그가 일했던 시민단체도 그로 인해 조직이 해체됐다가 다시 봉합됐는데 10년동안 그와 같이 일했던 교인의 조언에 의하면 '그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면 흥미를 잃는다. 내버려둬라' 였다. 하지만 그 조언대로 하지 못하고 쫒아냈다. 하나님이 교회로 그를 보낸 이유가 있을텐데 그의 문자 폭탄을 받아야 하는 교인들은 괴로웠고 교회 밴드에 목사님이 올리는 글에 대한 반박글은 모욕적이어서 10년을 참고 기다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는 관심 받기 원하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독감을 심하게 앓는 청년이었다. 교회에 왔을 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불안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어딘가 아프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와 10년동안 같이 했던 교인도 교회라는 공간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쫒아낸 것에 대한 항변으로 교회를 떠났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가끔 이 일을 떠올리게 하며 목사님을 건드린다. 그래서 내보내셨어? 웃으며 디스하며 그런 결정을 내린 반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를 품어줄 공간을 꿈꾸기에는 내 과욕이다. 타인을 괴롭히던 엄마의 정신적 질환을 겪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말이다. 


그런데 나이들어서 일까. 쉬운게 싫다. 모두가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쉽다. 모두가 욕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 쉽다. 모두에게 인정 받는 사람을 칭찬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같은 성향의 정치색을 갖은 사람끼리 대통령 욕하는 것처럼 쉬운 일도 없다. 그런 소비를 하다보면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그 수준으로 평가 절하가 된다. 그것보다 좀더 의미있고 다른 방향, 다른 시선을 만들고 싶다. 어려운 관계, 쉽지 않은 길, 다른 관점을 얘기 나누며 발전하고 싶다. 나이 들면서 뭔가 하고 싶은 의욕이 떨어졌다. 벌리고 추진하기 귀찮다. 그러다보니 쉬운 방법은 더더욱 재미가 없다. 자극적이고 환기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불교도 기웃거리고 정토회 불교대학을 다니고 증산교, 대순진리회등 그들이 하는 얘기가 뭔지 귀기울이고 궁금해 법회도 가고 불교 말씀도 듣고 법문도 찾아본다. 교회 분위기가 이런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배척하지 않아서 그러려니 한다. 한번은 오빠의 장례식이었다. 엄마의 친정은 기독교분들이 많고 나도 그러하니 목사님께 예배를 집도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하지만 아빠쪽은 불교여서 친가 식구들을 생각하니 제사를 지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두가지를 병행했다. 병원 장례식장 사무실 사람이 '기독교식으로 하는데 제사를 올리신다고요? 그래도 괜찮으세요?'를 몇번이나 물었다. 목사님께 말씀드리니 '유명한 사람들은 5대 종단에서 와요'라는 말에 용기를 얻었다. 목사님이 오빠를 위해 100일 기도를 해주면서 나는 진관사에 300만원을 내고 49재를 했다. 교인들도 와서 스님이 집도하는 예를 함께 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불광동 선린사에 어릴적부터 갔다. 새벽이면 움터오는 이슬이 해를 받아 촉촉해지는 산사의 기운이 몸에 있다. 뭔지도 모르고 향내를 맡으로 아빠의 위패에 절을 해서 불교에 대한 관심과 반가움이 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유독 '사랑'을 강조한다. 유일하고 모든 감정에서 으뜸으로 친다. 사랑, 소망, 믿음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는 전세계인이 아는 내용일 것이다. 자주 듣다보니 진부하고 지루하고 어쩔땐 싫을때가 있다. 내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사랑은 음과 양처럼 미움과 한덩어리라는 생각이 든다. 좋고 싫은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일순간 싫을때가 있고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이 어느순간 풀려 웃으며 얘기하게 된다. 감정의 유통기 한은 의외로 길 때가 있지만 언제 그랬지?하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랑 안에는 미움이 찰랑찰랑 공존하고 있어서 미움을 잘 처리하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을 강조해도 무용지물이 된다. 사랑을 강조하기 전에 미움의 감정을 처리하고 받아 들이고 해동시키는 방법을 기술적으로 배워야 할 것 같다. 나같은 사람은 '미운 감정'을 들여다 보고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다. 그런 감정이 불편해서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은 고통이 내게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숫자로 느껴져 엄마가 학교까지 찾아와 이상한 행동을 해서 아이들이 미친년이라고 했던 말을 듣고 겪었던 창피함, 어린 나이에 엄마를 걱정하고 안색을 살피며 건강을 걱정했어야 하는 근심이 심리적 위축, 행동의 변형을 가져왔다. 


누군가 미워서 견딜 수 없을때 그 사람과 다른 조언자를 동석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저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그 사람을 고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자신을 들여다봐도 누군가 내게 교정하려는 태도나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는 커녕 더 큰 부작용을 낫고 관계만 악화될 뿐이었다. 그러다 기독교적인 방법을 생각한 게 '중보기도'였다. 그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해야지, 나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해야지 결심하는 순간부터 묘하게 기류가 바뀌기 시작했다. '중.보.기.도' 라는 개념과 단어만 떠올렸는데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안정감이 흐르고 신경세포가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러다가 그가 남을 험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살아갈 의욕을 잃고 우울하게 회피만 하다가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했다. 삶의 의욕 대신 우울감과 의욕 저하로 고독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미워하는 힘은 삶의 원동력이 돼서 그에게 에너지를 준다고 본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중에 특히 부정적인 감정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정적인 감정은 자신을 보호하고 아껴주며 돌봐주는 거름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부정하지 말고 인정하자 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그에게 편하게 대화하고 같이 밥도 먹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정적인 태도와 감정을 부정하면 또다른 부정의 악순환이 계속 된다. 


누군가를 철저하게 미워하는 것은 살아가는데 동기 부여가 되고 배설의 쾌감을 준다. 미움을 받아 들이고 나면 다음 단계의 감정으로 넘어간다. 미움이라는 감정에만 갇혀있지 않고 다른 기운으로 흐른다. 따듯함, 자애로움, 사랑 등 긍정적인 태도로 전환된다. 감정의 단계가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가 누구를 뒷담화하든, 미워하든 관여 안하게 되고 신경쓰지 않게 된다. 내 자신이 그의 태도가 거슬려서 미워했는데 그의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 내 태도가 변했다.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은 그와 일상을 나누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됐다. 믿음, 소망, 사랑뿐 아니라 미움도 질투도 괴로움도 모든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 졌다. 행동이 자연스러워졌다. 생각도 내려놓게 됐다. 그러다 또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게 될 것인데 대처하는 방법이 있으니 '올테면 와라, 즐길테다'. 밀가루를 뭉치려면 물기가 필요하다. 밀가루의 형질을 바꿔버리는 물처럼 전혀 다른 사람, 다른 세계의 경험, 다른 감점이 부딪히는 태도를 지닌다면 어려울 게 없다. 자신감도 생기고 자기 표현을 다른 사람을 빌려와서 하지 않게 된다. 이런것을 기르는데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시간을 살았던 다종, 다양한 사람과 '만나는 것'으로 가능하다. 한번은 교인이 이사를 해서 집들이를 했는데 아마 세상에서 그렇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것은 드물지 않았나. 사오정처럼 다른 말을 하고 다른 해석을 하고 뭐라고? 뭐라고 그랬다고? 귀도 어둡고 눈도 안보이지만 모인 것 자체로 은혜롭고 향기로운 사람들 냄새와 맛이 좋았다. 


누군가 꼴보기 싫어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관찰하다면 그 안에서 나를 만난다. 내 눈에 꼴보기 싫은 사람의 태도는 나한테 있다. 그것에 관심이 있고 불편하고 그것을 마약처럼 쓰면서 살았기 때문에 '잘 보이고 잘 아는 것'이다. 진짜 명품을 쓰는 사람은 가짜를 구별한다. 내 안에 꼴보기 싫은 모양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도 보인다. 초능력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남 탓이 도움이 안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을 외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문제점을 안고 살아간다. 내 것을 해결 못하는 지름길은 남 탓이다. 남 탓은 얼마나 쉬운가. 남 욕은 얼마나 간단한가. 거기에서 한단계 발전하고 싶은 욕망과 욕구가 있다. 그래서 나를 보게 된다. 나는 후진면도 있고 괜찮은 면도 있다. 누군가에게 내가 싫지만 누군가에게 나를 흠모한다. 나도 그렇다. 그렇게 부족한 사람들끼리 만나 살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일, 사랑이다. 서로의 장애와 장점을 끼워 맞춰 체인이 움직이면 바퀴가 굴러간다. 부족하고 못난면은 생각일뿐이다. 생각으로 만들어진 괴물에 발목 잡힌다면 골목길에 걸어가는 낯선 타인 때문에 공포에 휩싸이는 것처럼 자신의 미움을 인정하고 들여다 보면 나를 만난다. 이번주 토요일은 '법화림' 입춘법회를 간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수행하는데 큰 도움을 받아서 한 달에 한 번 있는 법회에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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