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노 Jun 21. 2020

보험을 해지했다

몇 달 동안 골머리를 썩히며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하던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험. 보험을 든지는 1년이 안되었다. 작년 10월부터 들었으니까 지금까지 총 9개월 납부. 근데 저해지 환급형이라 해지했을 때 환급금은 거의 없으며 달러 종신보험에는 선납입, 추가납입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이것도 해지환급률이 낮아서 원금 손실이 어마어마하게 큰 상황이었다. 20대 중반의 나이 치고는 보험을 너무 많이 들어놨고 한 달에 빠져나가는 보험비가 월급의 10프로를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보험은 전 남자 친구의 소개였던 보험설계사의 말발에 넘어가 이 보험을 지금 안 들면 내가 굉장히 손해를 볼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어 보험을 가입하게 되었다. 한 달에 빠져나가는 금액이 굉장히 부담스러웠지만 설계사는 굉장히 거만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리며 얘기했다.

"당장은 부담스럽겠지만 초기에 잡아놔야 나중에 보험 세탁할 일도 없어요. 나중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거예요."

뭐 보험 든다고 고마워할 것 까지야.. 설계사의 거만한 말투와 표정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 보험은 뭐 들어놓으면 다 도움이야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아무 생각이 없다가 보험을 들어놓은지 5개월 정도가 넘어서야 재테크에 관심이 많아지게 되면서 보험에 대해서도 다시 점검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난 종신보험의 개념조차 모르고 들었다. 내가 죽으면 받는 보험금.. 한창 뼈 빠지게 모아야 할 나이에 살아생전에 타 먹지도 못할 종신보험을 다달이 힘겹게 내는 것부터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험 자체의 문제보다는 현재 내상황과 맞지 않은 보험 컨설팅과 내가 호갱이 된 것 같은 생각까지 들면서 엄청난 고통 속에 지내었다. 

'해지하자니 지금까지 납입한 보험금이 아깝고 계속 들고 가자니 19년 하고 3개월은 더 납입을 해야 하는데.. 아니. 나중에 진짜 내가 아파서 큰돈이 필요한데 해지한 거 후회하면 어떡하지? 아냐. 큰 병에 안 걸릴 수도 있는데 지금 좀 손해 보더라도 해지하는 게 낫지.'

라는 뒤죽박죽 생각 속에 맴돌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끙끙 앓았다.


또 보험 때문에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보험 관련 영상을 찾아보다가 부동산 읽어주는 남자의 '부자 되려면 보험부터 해지하라'라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이 영상을 보고는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저는 보험에 가입해서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아팠는데 보험 덕분에 큰돈을 받게 되어서 걱정 없이 치료를 잘 받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보험을 잘 이용해 혜택을 받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혜택을 모든 사람들이 받을 수는 없다. 이런 혜택을 받는 사람이 50명 중에 1명 꼴이라 하면 50분의 1의 사람은 보험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해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었고 나머지 49명은 내가 낸 돈의 반에 반도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나도 언젠간 저 사람처럼 혜택을 받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납입을 한다는 것이다. 보험이라는 자체가 만약을 대비한 큰돈이 필요해서 납입을 하고 있는 건데 나도 큰 병에 걸리지 않을까 지레 걱정만 하며 납입하는 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예시를 든 50명은 통계수치가 아니라 예를 든 수를 표현한 것이니 오해 마시기를)


보험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보험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보험설계사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를 하라는 말로 논리적인 타당성보다는 고객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계약을 하게 만든다. 이렇게 든 보험에서 고객은 확실한 내 인생계획과 생각으로 보험을 들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험을 잘 못 든 것 같다. 보험설계사가 사기꾼이다.' 라며 보험 해지와 많은 말들이 나오는 것이 현실적으로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가입을 한 것이 아닌 불안한 심리로 인해 가입한 것이 큰 화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험이 필요하다면 실질적으로 어떤 점에서 필요한지 어떻게 활용을 할 것인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족 내력으로 몸이 안 좋은 곳이 있다면 그런 점에서 보험을 들어놓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필요한 부분에서만 생각해야지 보험설계사가 내가 어떤 병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계속 만약을 대비하라며 계약서를 들이미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빠는 만약을 대비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를 따라다닌 계모임에서는 아빠가 항상 모임 장소에 첫 번째로 왔다. 그 이유는 차가 밀릴지도 모르니 늦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차가 밀릴지도 모르는 걱정에서 항상 이른 시간에 도착했는데, 그동안 수십 번의 계모임을 가봤지만 한 번도 차가 밀려서 약속시간에 늦은 적이 없다. 그리고 주말에 고향에 내려가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대전에 올라가야 할 때 가끔 아빠가 시외터미널까지 차로 데려다주는데 미리미리를 좋아하는 아빠는 역시 대전행 버스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시외터미널에 데려다준다. 그렇게 난 터미널에서 버스가 올 때까지 한 시간을 기다린다. 우리 집에서 터미널까지 차로 거리가 30분인데 말이다. 가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2배다. 오래 기다리더라도 차 타고 가는 게 편하니까 아무 말 안 하고 아빠 차를 탔는데 얼마 전, 기분이 상한 사건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터미널까지의 거리가 차로 30분 정도 걸린다면 기차역까지는 15분 정도의 거리이다. 기차는 시간대가 하루에 몇 개가 안돼서 애매한 시간 때문에 항상 시외버스를 예매했는데 그날은 그냥 일찍 갈까 싶어서 이른 아침에 기차를 예매한 날이었다. 아빠에게도 기차를 타고 간다고 얘기를 했고 혼자 알아서 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딸 좀 데려다 주라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아빠는 기차역까지 데려다준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다 엄마가 너무 이른 시간에 가는 거 아니냐고 시간 좀 미루라고 해서 시간을 바꾼 뒤 아빠에게는 바뀐 시간만 얘기했고 기차역에서 터미널로 바뀌었다는 말은 안 한 상태였다. 이번엔 한 시간이나 기다리기 싫었던 나는 살짝 꼼수를 부리기로 한 것이다. 기차 시간이 3시였다면 아빠는 분명 2시에 출발해 기차역에서 기차가 오기까지 30분을 넘게 기다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3시 버스를 예약하고 아빠가 3시에 출발하려 할 때 기차역이 아닌 터미널로 얘기를 하면 터미널에서 조금이라도 덜 기다릴 수 있으니 나름 머리를 굴러 계산을 한 뒤 2시가 되기 전쯤에 아빠가 있는 거실로 갔다. 아빠에게 기차역이 아닌 버스터미널이라 얘기를 했는데 아빠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붉어지면서 화를 내었다.


급하게 일어나서 엘리베이터 층수를 누르고 계속해서 화를 냈다. 지금 가면 차 놓친다고 차가 조금만 밀려도 기차 못 탄다고 이제 말하면 어떡하냐고 고함을 질렀다. 나대로 화가 났다. 항상 그 만약을 생각하는 아빠가 너무 짜증이 났다. 나도 어느 정도는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에는 약속시간에 딱 맞춰가기보다는 5분 더 일찍 가거나 영화관에는 10분은 여유를 두고 가는 편인데 아빠의 '미리미리'는 너무 도가 지나쳤기 때문이다.

"아빠. 지금 가도 기다려야 돼요."

라고 말하는 내 말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차가 밀릴지 앞에 사고가 날지 한 치 앞도 모르는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라고 뭐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만약을 생각하면 아파트에서는 어떻게 사나?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차는 어떻게 타나?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사고가 날지도 모르는데! 이런저런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아빠는 시간을 내서 편하게 날 데려다 주려는 거고 아빠의 이런 미리미리의 습관을 내 몇 마디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이번엔 버스터미널에서 버스가 오기까지 35분을 기다렸다. 그래도 한 시간을 안 기다려서 다행이다.


보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어나기 정말 희박한 일, 정말 만약의 일을 대비해 우리는 허비를 한다. 아빠에서의 시간과 보험에서의 돈이 그렇다. 아빠의 말대로 그렇게 미리미리 출발해서 갔는데 마침 앞에 사고가 나서 차가 밀렸고 여유시간을 두어서 버스터미널까지 늦지 않게 도착한다면 그건 정말 좋은 예이다. 미리 대비를 해서 손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겪기 위해 우리가 항시 대비를 해야 하는 건가. 30번 중에 한번 꼴로도 일어나기도 힘든 일을 매번을 시간 낭비를 하며 하릴없이 폰만 만지작거리며 터미널에서 기다려야 하는 걸까. 하릴없이 기다린 시간은 그냥 지나친다. 보험에서는 기다림이 돈이다. 돈은 내 시간이고 육체와 정신적 고통으로 얻은 산물이다. 그렇게 우리는 만약을 대비해 우리의 시간과 육체와 정신적 고통을 허비한다. 


보험을 해지한 이유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나를 조금 더 놓아주기 때문에서였다. 보험을 해지하고 하루 동안은 마음이 뒤숭숭했지만 그다음 날부턴 아무 생각이 없었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에게 부담이었던 이 보험은 만약을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편안해졌다. 그때가 되면 그때 돼서 생각하기로. 그저 지금에 더 충실하기로.








작가의 이전글 넌 말수가 적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