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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Sep 20. 2019

어둠이 짙어지면 무대처럼 빛나는 도시, 벨기에 브뤼셀

#1

새벽에 한참 빗소리를 들으며 잠결에도 날씨 걱정을 했는데 아침 풍경은 맑음 그 자체였다. 비를 맞아 더 진해지고 밝아진 건물과 담벼락은 사람들의 기분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터로 나가는 현지인의 표정도, 일찍 관광을 시작한 여행자들의 표정도 갓 연애를 시작한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종일 브뤼셀의 골목을 걷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만나고 싶은 누군가를 운명처럼 마주할 것만 같았다. 낡고 좁은 계단을 오르고 오래된 골목을 끊임없이 걸어 골목이 끝나는 모퉁이에서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2

그런 내가 우습기도 했지만 고양이 두 마리가 따뜻한 볕을 받으며 올라앉은 담쟁이가 가득한 집 앞에서 한참이나 혹시나 하는 마음을 붙잡고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듯 서성거렸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그 자리를 쉽게 뜨지 못했다. 그래서 아침에 숙소에서 싸온 빵과 커피를 꺼내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 



#3

유럽에는 어딜가나 최고의 일몰을 볼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브뤼셀 그랑플라스 광장의 해질녁과 야경은 유럽의 도시들 중 최고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특히 그랑플라스 광장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서 대성당, 시청사가 낮에서 오후로 그리고 밤으로 변해가는 순간과 오래된 건물에 조명이 켜져 낮보다 더 화려해지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광장으로 비껴드는 황금빛 햇살이 도시를 신비롭게 감싸기 시작했다. 곳곳에서는 거리 공연을 하는 기타와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퍼지고 서쪽 하늘에 머물러 황금빛을 내던 햇살이 마침내 광장에 무대 조명을 켠 듯 도시를 붉게 물들였다. 순간 광장 곳곳에 앉아 있던 여행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감탄과 박수를 쳤고, 서로에게 기대 있던 연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시간 앞에서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다. 여행자들의 심장은 더욱 뜨겁게 박동하고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얼굴과 가슴은 붉게 타올랐다. 해가 완전히 건물 너머로 사라지고 건물마다 등이 켜지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들처럼 곳곳에서 아! 하는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4

브뤼셀의 야경을 볼 수 있는 호스텔을 예약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밤바람이 쌀쌀해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 중에 낮에 광장에서 몇 번 마주친 여행자가 테라스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손에는 밝은 불꽃이 빠직거리는 불꽃놀이를 몇 개 들고 있었다. 불꽃을 손에 들고 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있는 모습이 이유도 알지 못하면서 슬퍼 보였다.


혼행, 혼술이 유행이고 혼자하는 시간이 주는 즐거움과 자연스러움을 충분히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직은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고정관념일지 모르지만 혼자하는 파티, 혼자하는 불꽃놀이와 같이 축하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들을 혼자서 하는 일은 너무나 아프고 쓰리다. 불꽃이 사그라들 때까지 멍하게 야경 어딘가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여행자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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