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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Apr 17. 2019

게으른 여행자에게 주는 선물, 이탈리아 베르가모

#1

여행을 느긋한 산책처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라면 도심 가까이에 숙소를 잡아야 한다.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 생소한 이름의 도시지만 예정에 없던 곳, 약속하지 않은 만남, 계획하지 않은 일정이 만드는 설렘이야말로 잊지 못할 여행의 즐거움 아닐까?


언제나 여행은 준비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설레는 법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기다리면서 출퇴근길 자동차로 터널을 지날 때마다, 좁은 골목길의 모퉁이를 지날 때마다 재미난 상상을 했다. 터널 너머, 골목길 모퉁이에서 내가 꿈꾸는 유럽의 어느 곳, 이탈리아나 에스파냐의 오래된 도시가 펼쳐지길 바랐다.


푸니쿨라에서 내리자 베키아광장으로 향하는 골목길이 펼쳐졌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떠올리던 바로 그곳의 모습이었다. 모퉁이가 궁금해지는 낡은 골목, 집집마다 내걸린 화분과 장식,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까지. 유럽 여행에서 내가 소망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안겨 주기에 충분한 도시였다. 즐거운 상상 끝에 살짝 미소 지었던 그 설렘이 지금 내 앞에 다가왔다.


#2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을까? 무릎이 뻐근해진 다음에야 베키아광장으로 들어섰다. 우아한 팔라초와 웅장한 성당, 종탑, 노천카페로 둘러싸인 광장 중앙에는 콘타리니분수가 앙증맞게 자리하고 있었다.


분수를 등지고 빙그르르 몸을 돌리자 아름다운 산타마리아마조레성당과 콜레오니예배당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란 잉크가 쏟아진 듯한 하늘 아래 성당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다른 도시의 큰 건축물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이곳만의 아기자기한 조형물과 한산함이 느긋한 여행을 즐겁게 했다.



#3

콜레오니예배당을 돌아보고 나오니 베키아광장에 내리쬐던 햇볕이 누그러져 있었다. 해가 기울어진 하늘은 어느새 짙은 색을 띠었고, 구름은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안젤로마이도서관을 등지고 앉아 어둠이 다가오는 광장을 바라봤다. 홀로 온 듯한 여행자 두세 명이 분수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타임랩스 사진처럼,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시간 속에 나를 포함한 여행자들만이 이 도시에 존재하는 듯했다.


이런 작은 도시는 분주하게 다닐 땐 오히려 마음에 담기지 않다가, 가만히 멈춰 설 때 비로소 도시가 말을 걸어오고 스스로 자신의 속살을 가만히 내보인다. 여행이 더욱 풍성해지는 순간이었다.



#4

언덕 위의 구시가지 ‘치타알타’(Citta Alta)를 둘러싼 성벽을 빠져나왔다. 저 멀리 롬바르디아평원과 바로 눈앞의 신시가지 ‘치타바사’(Citta Bassa)가 중세의 풍경화처럼 펼쳐졌다. 해가 지는 것을 한참이나 지켜본 다음, 도시를 싸고 있는 외벽 길을 따라 천천히 치타바사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계단으로 된 골목길이었다. 골목에 어스름이 깔려 오면서 땅에 가까운 것부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저분하고 황량하며 쓸쓸해 서늘한 느낌의 거리일지라도, 자신의 다리 부분은 어둠 속에 숨기고 그 얼굴에 불그스름한 빛을 받으면 따스하고 아름다운 거리로 변한다.


골목이 가장 따뜻해지는 시간은 어쩌면 해가 지고 어둠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그 30분이 아닐까? 그 순간, 이 골목에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선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벗어나고만 싶었는데, 이국의 땅에서는 특별할 것 없는 일

상의 모습이 이토록 아름답고 행복하게 느껴지다니. 줏대 없는 내 마음에 피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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