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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Sep 11. 2019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는 도시, 포르투갈 나자레

#1

나자레 이정표가 보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새벽에 출발할 때부터 말썽이던 휴대폰이 완전히 먹통이 되어버리고는 내비게이션 없이 도로 표지판을 보며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때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바른 길을 가면서도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중간중간 종이 지도를 펼치고 전체 이동 경로를 가늠해 보는 시간은 오랜만에 진짜 자유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해가 지고 있어 체크인도 하지 않은 채 카메라를 꺼내 바다가 보이는 곳을 찾아 나갔다. 마을은 작았지만 낯선 골목길을 돌다 보니 잠시 방향을 잃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가로등 아래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에게 길을 물어 길을 찾았지만 골목 끝으로 보이는 하늘이 오늘 일몰 사진은 포기하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혼자 바쁘고 답답했던 시간을 좀 늦추라는 메시지였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골목 계단에 앉아 주변을 돌아봤다. 그제야 나자레라는 이 작은 마을이 햇살이 비치는 낮에는 얼마나 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는 곳일지 짐작이 됐다. 


온통 흰 벽의 나자레는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도 내겐 천국이었다. 



#2

골목의 끝은 광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진에서 보던 나자레 대성당이 있는 시티 우지고 광장이었다. 철 지난 바닷가 관광지의 풍경이 어디든 비슷했다. 손님이 없어 서둘러 닫은 기념품점, 차곡차곡 쌓인 카페의 노천 의자와 테이블, 이제는 추워 보이는 파란색으로 디자인된 현수막이 그랬다. 그래도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광장에 홀로 있는 것은 큰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뿌듯한 기분과 비슷했다. 


바다의 영향인지 후드득 소리를 내며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려도 우산을 쓰지 않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 유럽의 도시에선 왠지 비를 맞아도 괜찮아, 여행이 아니면 언제 그래 보겠어라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비를 맞으며 걷어 보려 했지만 계속 걸음이 빨라지다가 숙소 앞에서는 전력 질주를 했다. 카메라가 젖으면 안 되니까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민망함을 피하면서. 


     

#3

예상했던 대로 한낮의 나자레는 산토리니의 느낌과 비슷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지루해졌다. 철이 지났다고 해도 여름의 유럽은 여전히 해가 길었다. 어두워지길 기다리다 지칠 것 같아 다시 나자레 대성당 방향으로 걸었다. 워낙 작은 동네라 그런지 중심가를 몇 번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지나치며 만났던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계속 마주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처음 지나칠 때는 단지 행인 중 하나였는데 두 번, 세 번 마주치니 눈인사를 나누게 되고 어느 기념품점에서 마주쳤을 때는 원래 알고 지난 이웃처럼 반갑다는 생각도 들었다. 


카페 벽면에 아무렇게나 세워둔 자전거가 이뻐 골목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다가 고개를 드니 기념품 상점에서 눈인사를 했던 노신사가 엄지를 치켜세우고 웃는다. 


     

#4

어제 찍지 못한 일몰 사진을 원 없이 찍고 다시 나자레 대성당 앞 광장으로 돌아왔다. 성당을 비춘 듯 뜬 하얀 반달이 어둠으로 덮이고 있는 광장의 소리를 삼키는 것처럼 고요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직은 여전히 푸른빛이 있는 하늘이었지만 희미하게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골목과 달빛의 광장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그 안으로 들어서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으면 중세의 나자레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곧 도시의 가로등 빛이 더 진해지고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성모의 기적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한 성당 안은 포근한 기운이 있었다. 입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손을 모으고 가족의 안녕을 비는 기도를 하고 나왔다. 성당 입구에서 낮에 카페에서 눈인사를 나누었던 여행자를 만나 인사를 했다. 미소가 멋있었던 그가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선 모습이 너무나 자유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내 여행도 언제나 저렇게 아름다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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