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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Jun 03. 2019

여행자의 등을 토닥이는 도시의 빛깔, 포르투갈 리스본

#1

철컥거리며 도시의 중심을 통과하는 트램은 내가 생각하는 유럽여행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이다. 특히 골목을 돌아 들어오는 트램을 보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세상 모든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리스본에 반드시 가야할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아슬아슬한 좁은 골목길을 달리는 노란 28번 트램 때문이었다. 트램 종점에서 여러 대의 트램이 교차하며 내 앞을 통과하는 순간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트램이 지나가는 순간들을 다양한 위치에서 카메라에 담은 후 고대하던 트램을 탔지만 두 정거장만에 내리고 말았다. 내 앞을 지나 모퉁이로 사라질 때면 다른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신기하고 두근두근했던 그것이 북적이는 여행객 틈에 끼어 타고 있으니 그냥 관광 기념물이 된 것 같았다. 트램이 지닌 모든 판타지가 맑은 날의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정말 사랑하는 어떤 것들은 그냥 나를 지나쳐 사라질 때 가장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내려두고 무심하게 출발하는 트램은 다시 마법처럼 빛을 내며 골목으로 빠져 들어갔다. 


#2

손목에 찬 디지털시계에서 알람이 울렸다. 하룻동안 걸은 거리가 17km를 넘었단다. 리스본 여행에서는 좀 더 많이 걸으며 쉼 없이 달려온 시간을 돌아보고, 비움 없이 채워서 용량이 다한 좁아진 마음을 정리하겠노라 마음을 먹었는데 며칠 지나고보니 비우겠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정리를 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뤄둔 다락방이다. 버리기엔 아까워 언젠가 다시 쓰겠지하고 쌓아두었다가 10년이 넘게 먼지를 덮고 앉아있는 곳. 이젠 그 다락방도 한계에 있었다. 작은 충격으로도 아무렇게나 쌓아둔 마음들이 당장 쏟아져 무너질 것만 같았다. 잊고, 용서하고, 포기해야 새로운 마음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오자마자 확 트인 큰 길과 광장, 바다를 만났다. 해가 지는 바다로 걸어가며 내 자신에게 다시 말했다. 지나간 일은 이제 놓아버리자고. 



#3

내가 숙소를 정하는 원칙 중 하나는 되도록 중심가에서 벗어난 외곽이나 근교의 소도시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숙박비의 차이도 크지만 관광지가 아닌 현지인들의 삶에 조금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고 여행 안에 또 다른 작은 여행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 하루 일정과 도시 사람들의 출퇴근시간이 맞는 날에는 복잡한 시내버스나 전철에서 살아있는 그곳의 모습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리스본이 바다 너머로 보이는 알마다(Almada) 사람들은 시내버스처럼 운행되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도시로 나가고 들어왔다. 2층칸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금세 모든 자리가 차고 통로에도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앞 사람과 무릎이 닿는 좁은 자리였지만 하루 종일 돌아본 리스본의 유명 관광지보다 특별한 15분 여행이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다. 마침 창밖으로 보이는 노랗고 붉은 하늘과 보랏빛 바다는 아름다운 추억 첨가제가 되었다.

     

     

#4


숙소로 걸어가는 길.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연인이 한참을 씩씩 거리다가 토라진 여자가 남자를 뿌리치고 앞서 걸었다. 배우처럼 멋진 두 사람들의 모습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교차로에서 숙소 방향과 길이 달라졌지만 두 사람이 궁금해 조금 돌아가면 그만이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 걸었다. 한참 고개를 푹 숙이고 뒤따라 걷는 남자의 모습이 안쓰러운지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포옹하고 입을 맞추고 깔깔거리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뻔한 진행과 결말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행복한 영화였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더 이상 기대하는 것도 궁금한 것도 없어지는 삶이다. 내가 믿고 있었던 무언가가 실은 다른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동화나 소설, 영화에 공감해 자신을 투영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고 아낀 모든 것들이 어느날 내게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는 현실에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늙어버린 자신을 마주하는 날이 아닐까? 기대하고, 무너지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생이 언제나 아름답고 젊은 게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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