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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Dec 14. 2019

포근하고 낭만적인 눈의 도시, 스위스 체르마트

#1

산악지형으로 된 스위스는 고속도로가 있어도 이동이 쉽지 않았다. 프랑스 리옹에서 새벽에 출발해 제네바, 로잔, 시옹, 브리그를 경유하는 총거리는 380킬로 정도였지만 실제 체감하는 거리는 500킬로미터 이상이라서 중간에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달려도 거의 6시간이 걸렸다. 일반차가 진입할 수 없는 체르마트는 태쉬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기차로 들어가야했다.      

체르마트에 묵는 동안 필요한 짐만 꺼내 빨간색 열차를 타고 설산의 중심에 숨겨진 보석 같은 마을에 들어섰다. 눈으로 가득한 체르마트의 풍경은 내가 상상한 모든 것을 뛰어넘는 공간이었다. 짙은색 나무로 지어진 집은 흰 눈속에 여기저기 박혀있는 진짜 보석처럼 보였다. 짐이 있어 전기차를 탈까 잠시 고민했지만 일행 모두 골목길을 걸어 숙소로 가자는데 동의했다. 도로에 눈이 녹아 불편했지만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모든 것을 감수하게 했다. 골목 여행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걷는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고르너그라트로 올라가는 산악열차에서 마터호른을 보고 싶은 마음에 억지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주변을 살펴보며 걷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여행의 모든 순간이 즐거움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새삼 떠올라 혼자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2

고르너그라트에는 혼자 올라가기로 했다. 아무리 좋은 동행이 있는 여행에서도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했다. 특히 여행의 마무리하는 순간은 더욱 혼자 있고 싶었다.  열차 안은 여행객들로 만원이었다. 마터호른이 잘 보이는 창가 구석에 외국인 가족 틈에 끼어 앉았는데 마주앉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과 눈이 마주쳤다. 서양인들이 눈인사에 익숙한 것은 타고난 것일까? 소녀는 찡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내렸다. 순간을 놓친 나는 주뼛거리며 어색하게 창밖에 선 소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 여행길을 출발하며 난 불필요한 낡은 마음을 버리고, 차가운 마음을 조금은 녹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여행의 끝에 서니 무엇인가 가볍고 따뜻해진 마음이 든다. 버리다보면 얻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가벼워진 빈 마음이 있을테니까.

            

#3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마터호른과 그 주변 봉우리의 모습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짧은 여정에 혹시라도 날씨가 나빠 스위스 설산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을까봐 노심초사했는데 기우일 뿐이었다. 구름이 거의 없는 화창한 날씨에 마터호른의 아름다운 풍광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고르너그라트 정상 전망대에서 한참 사진을 찍고 내려와 정상에 있는 호텔에 딸린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레스토랑 안의 창은 그대로 사진 액자 기능을 하고 있었다.      

봉우리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붉은 기운이 하늘에 가득해졌다.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고 전망대로 올라가 마테호른이 빨갛게 변해가는 최고의 순간을 카메라와 눈, 그리고 가슴에 담았다. 돌아가 캔버스에 옮길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4

해가 지자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전망대 카페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세상이 어둠에 들어가는 시간을 기다렸다. 체르마트로 내려가는 마지막 열차가 떠나고 고르너그라트 정상은 고요해졌다. 말로만 들어본 ‘적막, 적멸’의 순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우주에 나가면 느낄 수 있다는 절대 고요가 이런 것일까?     

하늘은 말 그대로 별이 쏟아지다는 표현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비현실적인 공간과 시간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묘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멍하게 있었다. 유럽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스위스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얼어 죽지만 않는다면 밤새 이 자리에 앉아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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