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뜨 부근의 호스텔 옥탑방까지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는 일은 무척 고역이었다. 하지만 복도 끝에 붙은 낡은 나무문, 19세기부터 썼을 것 같은 녹슨 열쇠는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했다. 이쪽저쪽으로 수십 번을 돌리고서야 문을 열었다. 방안엔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그윽한 향이 가득했다. 기둥과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된 좁은 공간에 누우면 천장의 작은 창이 비스듬히 내다보였다. 테라스에서는 19세기 카유보트의 그림 속에 나오는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 내리는 파리 골목은 아름다웠고, 낯설었고, 영화처럼 인상적이었다. 완벽한 풍경, 특별한 시간. 여행이 주는 기적이었다.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한참을 내다보던 그녀는 테라스에 기대서서 장난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아, 가기 싫다." 세 번이나 소리를 질렀다.
"아, 가기 싫다. 아, 정말 가기 싫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크게 웃었다. 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며칠만에 습관이 되어버린 말을 꺼냈다. 물론 그 안에도 내 마음은 가득했지만.
"우리 나가서 좀 걸어요. 커피도 한잔 마셔요."
노틀담 성당이 보이는 다리에서 내가 파리를 그리워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다. 분명한 것은 특정한 건축물이나 장소 때문은 아니라는 것. 어쩌면 파리를 그리워한 게 아니라 여행 자체를 그리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설고 아름다운 곳에 나를 내려놓는 것만으로 고단했던 나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니까. 그게 여행이니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노틀담 성당은 빛나고 있었다.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라고 당부하듯, 긴 종이 울렸다. 생의 하루하루도 늘 이 순간 같기를. 후회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태양처럼 뜨겁기를.
앞서 달려간 그녀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반응이 없이 웃기만 하자 그녀는 찡그린 얼굴로 내게 걸어왔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았다. 마치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그녀는 노틀담 성당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다. 나는 어느 건물 입구 계단에 앉아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제 그녀와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찌르르 쑤셨다. 어떤 헤어짐이든 아프지 않은게 있을까?
한 두 송이 떨어지기 시작한 눈은 순식간에 솜뭉치가 쏟아지는 것처럼 도시를 덮기 시작했다.
눈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쏟아진 폭설에, 소방대원들마저 광장에 차를 세워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늦은 시간 좁은 골목에는 사람도 없고 간간히 켜진 가로등만 깜빡였다.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서도 떨림이 느껴졌다. 소박한 나무문과 창문마다 걸린 다양한 장식들, 무심한 듯 놓인 상점의 간판은 따뜻했다. 골목을 빠져나가면 아마도 다시 이 골목을 찾아오진 못하겠지. 다시는 찾아갈 수 없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골목.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1시간 2분 남았다. 그녀는 내일 새벽 서울로 돌아가고 난 파리 근교 오베르로 갈 것이다. 가서 고흐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보았을 그 풍경 앞에 설 것이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그녀가 커피를 마시고, 커피를 좋아하는 내가 커피 대신 허브차를 앞에 두고 앉았다. 우리는 함께 하얗게 눈으로 지워지고 있는 파리를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한꺼번에 목구멍을 빠져 나오려고 해서 그런지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먼저 토하듯 말을 꺼냈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났던 것처럼 우리 자연스럽게 헤어져요. 자유로운 여행자처럼요."
"그래, 좋아요. 나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웨이터에게 화장실용 코인을 받아 들고 지하층에 있는 화장실로 내려갔다. 볼일 없이 들렀기에 이유 없이 손을 씻고, 이유 없이 거울을 한참 들여다봤다. 헤어지는 순간이 두려워서 그런 건지, 그녀가 여유 있게 사라질 시간을 만들어주느라 그런 건지 어느새 마음속으로 끝 모를 숫자를 세고 있었다. 더 천천히, 더 천천히 하나부터 백까지 숫자를 세고 또 손을 씻고, 거울을 보고 화장실을 나왔다.
돌아온 자리에 그녀는 없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사라졌다. 그리고 사진이 포함된 문자를 내게 보냈다.
--- 우리가 앉았던 자리를 찍었어요. 서울에서도 함박눈이 내리면 언젠가 생각나는 날이 있을 거예요. 제 가방에 당신이 넣어둔 스노우볼도, 엽서도, 그림도 너무 고마워요. 마지막 엽서에 쓴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당신의 말, 잊지 않을게요. 어쩌면 모든 것은 진짜 이제부터 시작일지 몰라요. 당신도 이제는 고흐와 테오의 무덤 앞에서 너무 아파하지 말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