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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Sep 13. 2024

소설....검은 코트의 여자

카페에서 나와 센강을 따라 걷기 시작한 나는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파리의 겨울은 여전히 차가웠고, 강바람은 얼굴을 스치며 추억을 깨워냈다. 3년 전,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길 위에서 나 혼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더욱 아리게 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걷던 그날의 설렘은 이제는 기억의 한 조각이 되었고, 그 조각은 세월이 흘러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녹아들지 않았다.


카페에서 마주한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 불편해 보였던 그녀의 표정, 계절을 무시한 여름옷 위에 걸친 그 검은 코트. 마치 다른 시간에서 온 사람처럼 그녀는 차갑고 고요한 파리의 겨울에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가 단순한 여행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의구심을 품은 채, 3년 전 그녀와 함께 걸었던 센강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았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상념들에 잠기며 한참을 걸었지만, 그녀는 그날의 파리만큼 멀게 느껴졌다. 발걸음이 무거워지면서, 나는 결국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호스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왜 그토록 불편한 표정으로 카페를 돌아보고 있었을까?


몇 날 며칠을 파리에서 계획 없이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오르세 미술관을 찾았다. 파리에 온 김에 오르세 미술관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예술 작품들과 따뜻한 공기가 나를 맞아주었다. 오르세 미술관은 언제나 나를 안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오래된 기차역을 개조해 만든 그 공간은 역사와 현대가 묘하게 뒤섞인 느낌을 주었고, 그 속에서 나는 항상 고요한 평화를 느꼈다.


고흐의 작품들 앞에 섰을 때, 나는 그의 붓터치와 강렬한 색채에 다시 한 번 매료되었다. ‘별이 빛나는 밤’과 ‘아를의 별밤’ 같은 작품들이 주는 감동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내게 깊이 스며들었다. 고흐는 세상과의 단절을 그림으로 표현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오히려 그가 세상과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문득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흐의 작품 앞에서 조용히 감상하던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바로 그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이번에도 그녀는 어딘가를 찾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고, 그 여름옷 위에 검은 코트를 걸친 모습은 이번에도 뭔가 어색했다. 그녀는 고흐의 작품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살피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듯한 그 눈빛이 나를 다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거지?’


그녀는 결국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멈칫하더니, 이번에도 나를 알아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빠르게 미술관을 벗어나려고 했다. 나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미술관 내부에서 그녀의 행동은 점점 더 이상해졌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하면서도, 마치 그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려는 듯한 모순된 모습이었다.


내가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속도를 냈고, 결국 미술관을 나가려는 순간에 나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그녀는 걸음을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다.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고, 마치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며칠 전 그 카페에서... 당신을 봤어요. 무언가를 찾고 계신 건가요?"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절 따라오지 마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 다시 뒤돌아섰다.


나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에 발이 묶였다.


그녀가 미술관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오르세의 웅장한 기차역 내부가 한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이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 왜 그녀가 내 시선을 이토록 사로잡는 것일까? 그리고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흐의 그림 앞에서 느꼈던 감동이 서서히 사라지며, 나는 그녀의 비밀을 알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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