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내 평생에 가장 어려운 관계는 아빠였다. 우선 가장으로서 아빠는 정말 엄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어린애가 구구단을 못 외운다고 회초리를 들었다. 언니랑 싸우면 둘 다 팬티만 입혀 쫓아냈다. 아빠가 잠들고서야 엄마의 조용한 부름이 있었으니 내 생에 처음으로 두려워해 본 사람은 아빠가 맞았다. 그러나 나는 아빠를 좋아했다. 아침에 눈 뜨면 없고, 저녁 식사도 엄마와 언니, 나, 동생 넷이서 하는 식사가 익숙했지만 늦은 밤, 술 냄새가 밴 공장 작업복을 입고 돌아온 아빠에게 모두가 “다녀오셨습니까” 인사하고 돌아설 때 나는 아빠의 몸통을 두 팔과 두 다리로 조르며 안기거나 무언가를 사달라고 방바닥을 360도 회전하는 등 아빠와 온갖 실랑이를 벌였다. 가훈으로 쓰인 한자의 음과 뜻풀이까지 낭송해야 밥숟가락을 들게 하던 아빠만의 근엄 진지한 가정교육에 웃음소리 울음소리로 균열을 내고 싶어 하던 사람은 장녀 언니도 장남 동생도 아니 둘째 딸인 나였고, 나는 그 역할이 잘 맞았다.
능력 많던 아빠는 무언가를 사주는 데에서 기쁨을 느꼈다. 건강으로 능력을 잃은 아빠는 보람만 잃어도 족했을 텐데 더 많은 걸 놓으셨다. 놓기 싫어 강압적인 태도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빠는 1대 4의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아빠는 슬퍼 보였지만 죽지 않는 사자처럼 강해 보였다. 아빠를 유일하게 꺾게 만든 건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싸우는 모습조차 외면하는 거였다. 그런 시간들이 아빠를, 사람을 정말 늙게 했다. 막내아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할 일을 끝냈다는 듯이 한때 아빠는 아무에게도 곁을 주지 않을 사람처럼 지냈다. 그런데 내가 누구라고? 어린 날 아빠에게 몸통 조르기를 하던 그 딸. 불도 켜지 않고 TV 소리만 새어 나오는 아빠의 방이 무덤 같았다. 문틈으로 빠져나오는 담배 냄새만이 아빠가 잠들기 전이란 걸 알게 했다. 혼자인 아빠가 싫어 방문을 홱 열어젖혔다. 그리고 큰소리로 “아빠, 요즘 세상에 누가 담배를 방 안에서 피워. 베란다 나가서 피워!”라고 했다. 이삼 년 반복하니 아빠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너는 다 좋은데 아빠한테 담배 가지고 뭐라 하더라”며 베란다로 나간다. 근데 그 말을 하는 아빠가 웃는다. 난 개그에 소질이 없는데 아빠는 나만 보면 웃는다.
어버이날 기념으로 형부까지 여섯 식구가 왁자지껄한 모임을 마친 다음 날. 엄마는 일하러 가고, 언니랑 형부는 부부데이트를 가고, 동생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갔다. 솔로도 뭣도 아닌 아빠와 내가 자연스레 커플이 되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기를 좋아하는 나는 아빠랑 어디 갈까만 서로 열 번 넘게 했다. “귀한 따님이 오셨는데 어디 갈지 안 찾아뒀어? 안 되겠네!” 아빠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지만, 요즘은 친구와 만나면 새로운 카페를 다녀오고 괜찮았던 곳으로 데려간다. 삼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긴 전성기를 누려본 아빠는 안목이 높다. 좋은 곳과 맛있는 게 무엇인지 안다. 그런 아빠를 따라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조수석에 앉아 쫑알대기만 하면 되니 이보다 편할 수 없다. 그날 우리의 데이트는 무려 7시간 동안 계속됐다. “아빠, 일 년 치 할 말 오늘 다 할 거야? 좀 쉬자” 해도 “아빠, 대화 양으로 치면 우리는 상위 1%야”라고 해도 “원래 부녀 사이는 말이 많은 거야, 이게 자연스러운 거야”라고 한다. 우리는 언 10년 만에 다시 자연스러운 부녀 사이가 되었다.
그날 점심과 저녁은 아빠가 차려준 7첩 반상을 받았다. 계란말이가 먹고 싶단 말에 아빠의 식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나는 삼십 년 만에 알았다. 아빠가 계란프라이도 아닌 계란말이를 무려 세 번은 너끈히 말아서 꽤 두툼한 형태로 만들 줄 안다는 걸 말이다. 자식이 귀여워 사진으로 남기는 부모처럼 나는 요리하는 아빠의 모습이 감동스러워 동영상으로 남겼다. 먹기는 내가 더 많이 먹었는데, 정말 맛있다고는 아빠가 더 많이 했다. 저녁까지 먹고 서울로 떠날 시간. 아빠는 기차 출발 5분 전까지도 여유롭다며 시간을 꽉꽉 채우고 나서야 나를 보냈다. 조심히 올라가라며 가장 비싼 지폐도 챙겨준다. 고맙다는 말도 아빠가 먼저 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 기억 속에 아빠의 표정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중 몇몇 모습들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수능 친 해 12월 26일, 중환자실에서 누운 모습 그대로 이승을 떠날 것 같던 무표정, 나와 더 대화하다간 답답해서 심장이 다시 터져버릴 것 같다는 짜증 난 얼굴, 내가 한 결정을 두고 인생에서 가장 후회할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며 확신하던 표정. 무슨 저주를 저렇게까지 확신 있게 하는지 섭섭하다 못해 아찔하고 겁에 질렸다. 아직도 이런 장면이 불편한 까닭은 아빠는 내게 여전히 너무 큰 사람으로 남아서다. 한밤중에 들리는 말소리면 부부싸움으로 착각하는 것도 어린 날 우리 집에서 듣던 고함소리로 들려서다.
그런데, 그럼에도 아빠를 좋아했고 좋아한다는 이유가 뭘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빠가 정말 어려웠다. 아빠를 떠올리면 흑빛의 사해에 서 있는 기분이란 문장이 술술 써질 만큼 가까워지기가 힘들었다. 긴 시간 충분히 미워해서 좋아졌을까. 아니다. 그냥 지나가는 시간이 답이었을 리 없다. 나의 언어로 아빠를 다시 보기 시작한 첫 문장은 ‘응애 하고 태어날 때부터 화내는 사람은 없다’였다. 아빠도 나와 다르지 않다로 시작했다.
나는 종종 아빠의 추억을 묻는다. 초등학교 때 아빠는 인기가 있었는지-많았는지 아니다 있었는지다-, 할머니는 어떤 이유로 돌아가셨는지, 아빠는 공부를 잘했는지 물으면 아빠는 인기가 있었는지를 말하기 위해 걸어서 한 시간 반이 걸리는 학교를 고무신을 신고 갔고, 아빠 친구들은 전부 까까머리였고, 동창 카톡방에 올라온 졸업사진에서 아빠를 찾아보라고 한다. 아직 난 할머니의 이야기도 아빠가 성적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되는 것도 많다. 법학과 졸업 후 백수시절, 아빠는 서울에서 연기를 해보겠다며 최불암 아카데미에서 면접을 봤단다. 그 말을 들으며 생각한다. 내가 신문방송학과를 전공한다 했을 때 큰 반대를 하지 않았던 게, 일반선택으로 들어본 법학 수업이 너무 재밌어서 감격스러웠던 게 DNA의 단서였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그림 찾기 하듯 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경험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당신과 내가 다르지 않으니, 내가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좋아하듯 나는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좋아할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서울로 가던 날, 아빠는 딸이랑 딱 10시간만 더 놀았으면 좋겠다는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고 5월 마지막 주 연휴를 앞두고 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뭐 하냐고 물어보길래, “아빠 나랑 놀고 싶어?”라며 선수를 쳤다. 으레 많은 부모처럼 아빠는 잘 먹고 잘 쉬면서 휴일을 잘 보내라고 말하지 두 시간이면 가는 거리에도 피곤할까 봐 내려오란 말을 참 어려워했다. 그랬던 아빠가 말한다. “응, 딸이랑 놀고 싶어.” 같이 장미축제에 가자며 달콤한 데이트 신청을 한다. 그렇게 서로 곁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