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나도 한때는 그이의 손을 잡고 내가 온 세상 주인공이 된 듯 꽃송이의 꽃잎 하나하나까지 모두 날 위해 피어났지.
아이유 <드라마>
누구에게나 전성기가 있고, 그 시절은 예고도 없이 끝난다는 이 노래는 새드 엔딩이다. ‘언제부턴가 급격하게 단조로 바뀌던 배경음악’이라는 가사를 한참 곱씹었다. 멀쩡히 다니는 회사도 있고, 대단한 걸 뺏긴 적도 없는데 ‘나도 한때’로 시작하는 노랫말에 떠오르는 추억은 어느 순간 변해버린 내가 묘하게 시든 것 같아 슬프다.
잘한다 잘한다에 익숙해서 쭉 잘할 줄 알았던 나는 못해서 안 하는 거 말고, 하기로 한 것 중에서는 내가 제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행복이 성적순이길 믿었다. 이 상한 논리에 놀랄 만큼 맹목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라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뒀다. 마음 한편에 늘 내가 제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너와 나는 평생친구라고 말하기에는 양심이 있던 거다.
욕심낸 모든 것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무기력에 빠졌을 때,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보자는 마음으로 모든 관계를 잘라내거나 그만두면서 스스로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될 것처럼 보여서 관심을 받으려던 날 붙들어 준 건 뜻밖에도 나보다 못나길 바라온 친구들이었다. 이래서 안돼 저래서 못해 몇 년째 신세 한탄하는 내 입에서 일상의 대화가 나올 때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어줬다. 나를 드러내기 싫다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화보 모델 촬영하듯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 프로필 사진도 바꿔줬다. 정신 차리라는 모진 말로 얻을 건 미움 사는 것뿐인데 기꺼이 기회비용을 치렀다. 심지어 내 고민을 SWOT 분석 보고서로 만들어 준 친구도 있었다. 축하도 위로도 충고도 사랑도 다 내어준 사람들.
이 같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나는 안전하다고 느꼈다. 살 것 같다는 마음이 생기고 딴생각을 할 여유가 생기자 궁금해졌다. 뭘까? 가족도 아닌데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는 이 마음들은 대체 뭘까? 내가 잘되나 못되나 큰 이득이 없는데 이렇게까지 한다고? 내 생일이라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와서 젤리클석에 앉아 나와 뮤지컬을 본다고? 잠수 탄 내가 뭐 예쁘다고 크리스마스며 생일이며 때맞춰 사랑, 축복을 새긴 사진을 보낼까. 힘들 때 보니 좋더라, 평이 좋더라, 신선하더라 다른 이유인 듯하지만 같은 마음으로 보내온 책들이 책 장 한 칸을 채웠다. 그렇게 여러 손길이 한 명의 수신자인 나에게로 왔다.
나는 이들의 몸 둘 바 모르는 애정 표현에 고백해야 했다. 나는 정말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인데, 속으로 늘 경쟁하고 있단 걸 느꼈으면서 어떻게 나를 이렇게까지 아껴줄 수 있는지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고 말이다. 그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같이 책임져 줄 거란 말을, 그 무게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기어코 하는 사람들이 이럴 땐 말없이 웃을 뿐이다. 그렇게 끝까지 멋있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았다. 고맙다고 웃으며, 화답으로 오래 보자는 말을 시작했다. 앞으로 시간 중에 오늘이 가장 적게 돌려줄 수밖에 없으니 부디 오래 보자고 했다. 나도 손을 내미는 순간 긴 터널을 나왔다. 당신들이 밝혀준 그 손을 잡고 나왔다.
오늘의 내 글은 뭉툭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여전히 모르기에 그들을 표현하는 마음이 정확할 수 없다. 대신 따라 하기로 한다. 경쟁으로 멍드는 것 대신에 목청 크고 논리로는 어디서 싸워도 지지 않을 똑부러짐과 항상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끝맺을 줄 알며, 괴로워하다 입맛을 잃을지언정 소신을 잃지 않는 그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눈코입, 손가락발가락, 귓구멍콧구멍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몸 구석구석에 그들이 있다. 그 단단한 관계들로 짱짱하게 채워진 나를 상상하면 내가 더 좋아져 버린다.
그래서 나의 <드라마> 가사는 이렇게 바뀐다.
부대 고시반, 관악산 정상, 서울 골목골목 떡볶이집
언니들과 함께 나눴던 주옥같은 시간들
우리 다시 또 수다 떨 수 있을까 시끄럽다고 혼날 수 있을까
하루 단 하루만 기회가 온다면 죽을힘을 다 해 떠드리
추신. ‘멋있으면 다 언니’인 거 알지? 친구, 동생, 언니 모두가 나의 애정하는 언니들.
나는 이 노래를 언젠가 나의 결혼식에서 부를 거야.
가족도 아니면서 가족보다 큰 마음을 보여준 당신들에게 이 노래를 헌사할 거야.
사랑한다고. 계속 수다를 떨자고. 그리고 내게 생겨버린 그이도 함께 예뻐해 달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