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피천득 시인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너를 울게 만들 테니 너무 작은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그리고 아이는 답한다. ‘아빠 말씀이 옳았다고,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나를 울게 만들었다고.’ 어린아이에게 부모의 말은 삶이 된다. 오늘은 나의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내 생에 첫사랑인 그녀에 대한 이야기다.
눈도 뜨지 못한 순간이었다. 기억에도 없다. 그런 나를 끌어안으며 이름을 부르고 반가워했다. 그녀는 몸을 더듬거리며 기어오르는 나를 꼬옥 안아줬다. 그때부터였다.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던 순간 말이다. 나는 사랑하는 그녀가 50kg 이상 나가는 걸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말랐다는 표현에 가까운 그녀가 통통하게 보인 때가 있었다. 내가 세상에 있기 2년 전, 한 남자와 팔짱을 끼고 있는 사진에서 말이다. 세 번의 출산과 다섯 사람 몫의 살림, 누구 한 명의 손 보탬 없이 그 모든 걸 도맡고 공장이든, 마트든 어디로든 일을 다녔던 그녀의 삶은 평생 허리둘레 44인치의 비결이었다.
그녀는 좋은 게 생기면 생각나는 얼굴이 많은 사람이었다. 좋은 고기가 들어오면, 언제나 제 신랑과 아이들 밥그릇 가까이에 둘 뿐 그녀 자신은 고기 없는 쌈을 맛있다며 먹었다. 향 좋은 과일이 생기면 숭덩숭덩 썰어 그릇에 담고선 제 입으로는 발라내지 못한 과육만 한 두 입 먼저 먹고 배부르다 할 뿐이었다. 아이가 셋이었던 게 문제였을까 신랑이 대기업의 잘 나가는 차장밖에 되지 않아서였을까 그녀는 언제나 아껴 썼고, 부지런했고, 좋은 건 가지기보다는 양보하는 쪽이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니 나는 틀림없이 그녀를 사랑했다. 난 그 사람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구분 않고 배웠다. 그래서 때로는 화도 냈다. 좋은 걸 사 입고, 좋은 걸 먹으래도 누가 해주지 않으면 영 어색해서 해내지 못했다. 삶의 황금기일 때도 그러지 못했으니 주머니 사정이 팍팍할 때에는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줄 게 없어서 미안하다, 부족함 없이 해주고 싶은데 그래도 예전에는 나았지? 그런 모습이 내게서도 비칠 때, 나는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라며 소리쳤다. 엄마가 그러면 나도 그렇게 산다고 말이다.
사랑이 힘들면 관두면 될 일인데 나는 그녀를 바꾸고 싶다는 오만을 부렸다. 나는 당신에게서 나와 당신의 되고, 당신보다 조금 더 세상에 머무르는 존재이니 당신은 내게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요했다. 명령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한다는 걸 알아서다. 그러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에서 달라진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고단한 삶이 이내 그녀의 눈두덩이를 빨아 당기고, 입가에 잔주름을 멋대로 낙서하고, 또렷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자꾸만 초점을 잃으며,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던 지친다는 표현이 들린단 걸 알았다. 씀씀이를 아낄 줄 알고, 몸을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좋은 거 나눌 줄 알아서 그녀 곁에 사람이 많듯 내 곁에도 사람이 생긴다는 걸 고마워할 때쯤, 정말로 나만 당신이 되고 나만 조금 더 세상에 머무르는 존재가 될까 봐 겁났다.
요즘의 나는 그녀에게 조금 다른 표현을 한다. 내가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서 오늘 하루에도 얼마나 넘치는 사랑을 받았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열거하며 덕분에 바빴다고 말한다. 내게 다정한 애인이 생겨서 마음이 놓인다는 말을 할 때면 내가 잘해줘서 그 사람도 다정한 거라고 그리고 엄마, 당신을 닮아서 잘해줄 주 아는 거라며 고맙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좋은 거 사 입고 좋은 거 먹으라는 말 대신에 좋은 거 사러 가자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오늘 나와 함께 하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