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단서
당신이 시장에서 물건을 산 다음 회사에 물건을 챙기러 들렀다가 대중교통을 타고 집에 돌아온다. 이때 당신이 만나게 된 사람과 대화를 나눈 사람은 몇 명쯤 될까?
오늘은 일상에서 흔히 하는 스몰토크, 그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몇 명쯤 만났을지 몇 명과 말을 섞었을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면 오늘의 글도 잘 읽어봐 주시길 부탁드린다.
광역버스를 타고 시청에 내렸다. 친구네 놀러 갔다가 동네 카페에서 줄 타는 산타를 보고 홀딱 반했다. 얼마나 귀여웠냐면 소품을 꾸미던 카페 아르바이트생마저도 스스로 반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귀여운 산타는 남대문시장에서 사왔다해서 친구들과 헤어진 직후 남대문 시장으로 갔다. 숭례문 옆 길목을 따라 줄 타는 산타를 판다는 상가로 들어갔다. 상가에서 들어간 첫 번째 가게는 시즌오프 오르골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본인은 사장이 아니 경비라 밝힌 정체미상의 아저씨의 설명을 들으며 멀쩡히 캐럴이 나오고 반짝이는 눈이 오는 오르골에 반해 사러 갔다. 사장이라는 분을 찾아가 결제를 하려는데, 손주에게 주려고 오르골을 산다는 할머니와 나란히 서게 되었다. 회전목마가 돌아가는 오르골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정말 예뻐요"라고 하자 할머니가 정말이냐며 가격이 비쌌지만 애들 주려고 산다며 다시금 자랑하셨다. 내 것과 비교하면 2.6x배 되는 가격의 오르골인데 손주 주려고 샀다는 할머니의 말에 정말 잘 고르셨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 몇 차례 더 예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더니 할머니께서 오르골 하나를 더 보여주시더니 이건 어떠냐고 물으셨다. 눈사람 모양의 오르골이긴 했는데 움직임이 없어 아까 전의 오르골이 더 이쁘다고 알려드렸다. 고민하는 거라면 목마 오르골이 더 이쁘다고 말이다. 그랬더니 손주가 쌍둥이라며 두 개를 사려고 한다 하셨다. 그러자 할머니와 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사장님이 “에? 안 돼요, 싸움 나요”라며 할머니께 아주 큰일 난다며 브레이크를 걸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그게 맞냐며 묻자 나도 사장님과 의견이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이내 같은 오르골로 사셨다. 할머니가 안전한 두 쌍을 사고 나오면서 할머니와 나 사장님 세 사람은 편안하게 웃으며 잘 가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움직이는 산타를 찾아 화훼시장 쪽으로 갔다.
화훼상가 진한 생화 냄새를 쫓아갔다. 꽃시장이라 그런지 이미 많은 상가에 불은 꺼졌고 천막이 쳐져있었다. 그래도 시즌은 시즌인지라 곳곳에 크리스마스트리와 포인세티아 그리고 전구들로 불 꺼진 상가의 고요와 적막 대신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채우고 있었다. 서너 집이 마주 보고 있는 한 모퉁이에서 화분 꽃꽂이를 하며 아직 손님을 받고 있는 곳이 있었다. 생화 냄새가 좋아 다가서자 사장님이 당연하게 뭘 찾냐고 물으셨다. 나는 반사적으로 포인세티아가 있냐고 여쭸다. 그러자 사장님이 빨간 포인세티아가 심겨있는 작은 화분 네 개를 보여주며 어떤 게 좋으냐고 물었다. 영업이 끝나가는 시간이라 가격은 천 원 더 빼주고, 커피 한잔 값으로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으니 사가라며 동감되는 말만 척척 하셨다. 어느새 오르골 봉투에 포인세티아 화분이 같이 담겼다. 그리고 꽃향기 좋아 바로 자리를 뜨기 싫어서 괜히 꽃집 사장님들이 열심히 꽃꽂이를 하는 걸 보면서 서성였다. 좋은 곳에 있다 보니 생각나는 사람도 있었다. 월요일에 예정된 데이트 때 크리스마스 운치가 넘치는 이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말을 속으로 하지 않고 입 밖으로 했고, 혼잣말이 아니었다 보니 사장님들과 어디서 일하는지 남자친구도 근처인지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 저 먼 꽃집 사장님이 “어디서 왔어?”라 하셨다. 울산이라 했더니 “울산 큰 애기네”라고 하셨고 나는 체구가 작아 울산 작은 아기라며 농담을 나눴다. 그렇게 잠시 있다 이만 가보겠다 했더니 잘 가라며 이 집 저 집 사장님들이 꽃가지 든 손을 흔들어주셨다. 멋있게 퇴장해야 했는데 불이 꺼지고 자물쇠가 감긴 출구 앞에서 헤매 상가를 한 바퀴 돌았다. 그랬더니 울산애기 왜 아직 못 갔냐며 한 분이 출구를 찾아 배웅까지 해주셨다. 3m가 안 되는 짧은 거리를 함께 가면서 사장님은 자녀 분의 시댁이 울산이어서 올초에 한 번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남대문시장에서 울산 ktx역이 있는 울주군에 대해 짧은 소감을 나누고 헤어졌다.
사장님의 친절한 배웅을 받고 집으로 가는 길가 한 상가에서 줄 타는 산타를 만났다. 그리고 내 앞에는 노래도 하고 말도 따라 할 줄 아는 트리와 춤추는 루돌프도 있었다. 징글벨을 부르며 360도 회전하는 루돌프를 보고 “와 너무 귀여워”라고 감상평을 했다. 그러자 크리스털 빛이 나는 머리방울을 한 여자아이가 "뭐가 귀여워요?" 라며 되물었다. 루돌프가 귀엽다는 내 의견에 여자 아이는 공감하지 못했지만 나는 루돌프고 귀엽고 질문하는 여자아이도 귀여웠다. 지나가는 중년 부부가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는 트리 인형에 메리크리스마스를 되돌려 받으며 깔깔 웃었다. “너무 귀엽죠”라는 똑같은 감상평이 오갔다. 시장에서 포인세티아와 산타 오르골, 줄 타는 산타까지 다 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라며 기분이 좋았다.
남대문 시장 빠져나오자 서울 크리스마스 명소인 신세계백화점 앞이었다. 많은 인파가 있었고 혹시 나의 사고를 대비해 많은 경찰분들이 있었다. 신호등을 기다리다 나는 한 경찰관 분과 마주쳤고, 나는 입모양으로 '고생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시내 한복판에서 크리스마스 장식보다 사람들의 안전을 먼저 살피고 있는 그분들들께 건네는 인사가 조금은 뿌듯함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이제 다음 목적지인 회사로 걸어가고 있는데, 지하철 출입구 앞에서 아빠 옆에서 신나게 점프를 하고 있는 어린이를 보았다. 뭐가 그리 좋아 뜀뛰기를 하고 있는지 몰라도 내 거울뉴런에 불이 들어와 나도 그 아이를 보면서 웃었다. 그러자 그 아이가 꺄르륵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의 웃음소리에 아빠는 “그렇게 좋아”하며 웃는 아이를 귀여워했다. 아이 아빠의 따뜻한 말투를 들으며 지나가는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훈훈해졌다.
회사에 들러 물건을 가지러 올라가는 길 로비의 경비 선생님과 남대문 시장에서 산 잉어빵을 나눠먹으며 인사하고, 물건을 챙겨 내려오는 길 다른 경비 선생님과 마주쳐 주말에 일하러 온 줄 알고 놀랬다길래 두 손에 든 봉투가 크리스마스 소품이라며 자랑했다. 15초의 짧은 대화와 주중에 다시 뵙자며 인사하고 지나가는 길 오늘 참 기분이 좋다고 생각했다. 지하철을 타고 보니 저녁 시간대였다. 홍대입구에서 승객이 많이 탔다. 내 옆으로 한자리가 비어있었는데 여학생 두 명이 서로 앉으라며 밀당을 하고 있었다. 보기 좋은 그 친구들에게 나는 “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요”라는 멘트를 했다. 그러자 고맙다는 인사를 돌려줬다. 자연스럽게 다른 한 명의 자리가 되었을 건데 고맙다는 말까지 들어 쑥스러워진 나는 다 왔다 싶어 자리에 일어섰다. 그러자 이번엔 여학생들이 먼저 “지하철 멈춰서 내리셔도 되는데”라며 재차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 더. 하차하려는 유리 창문 뒤로 나란히 앉은 두 여학생이 내게 손모양 하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놀라고 웃겨서 뒤를 돌아봤는데, 그 여학생들도 내가 뒤돌아볼 줄 몰랐는지 두 손 모아 만들던 하트가 반으로 가르고 입을 가리며 같이 웃었다.
그렇게 나의 외출이 끝났다.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한 순간 말고, 시장에서 집까지 이 짧은 순간들. 두 시간 채 안된 시간 동안 내게 있었던 이 많은 일들을 쓰고 보니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순간들이 가진 힘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나는 이 순간을 겨우 '스몰토크의 힘'이라고 밖에 표현해 내지 못했다. 내가 스몰토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고, 순간을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다만 내가 얼핏 아는 건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다정함의 힘이라는 거다. 찰나와 순간에 주고받은 이 대화가 누군가에서 선의로 닿고, 호의로 남아서 그들도 다른 누군가에서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다정함으로 우리는 잘 아는 타인뿐 아니라 잘 모르는 타인에 대해서도 불안과 불편, 불확실 대신 신의와 선의로 대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이런 다정함이 힘없이 자꾸만 흩어지고 파편화되어 가는 객체 1, 객원 1로 사는 하루하루를 따로 또 같이, 언젠가는 또 같이라는 유대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을까. 앞선 문장이 쓸데없이 거창했다.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그저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미소가 지어졌다면 부연설명할 것 없이 그게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