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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Feb 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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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단서

옷을 입는다

차례로 양말을 신고

발을 하나씩 끼워 바지를 입고

새 팬티, 새 팬츠, 새 양말을 신고

하의를 완성한다


여덟 시는 출근길이고

아홉 시는 사무실이고

열시는 업무전화를 돌리고


아침이라 커피를 마시고

껍질 벗긴 과일을 먹고

점심이면 누구들과 배를 채운다


저녁 일곱 시

저녁 여덟 시

저녁 아홉 시


시간 따라 

옷을 입고 벗어던지고

먹고 마시고 움직인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말은


많은 날 시간이 입히고 깨우고 재우지만

어느 날은 내가 시간을 입는다


어쩌다 시간을 둘렀을 때의 생경함은


시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간에 쫓기고

시간에 의미를 두지 않고 시간에 쫓기고


오락가락하는 새에 느끼는

시간의 생경함이란


시간이 주인인 채로 아닌 채로 흐른다

층층이 얼굴로 쌓인다


오늘 정말 좋은 얼굴을 하고 싶었는데, 말 끝나기 무섭게 마음먹기에 달렸는지를 시험 삼는 상황이 펼쳐졌다. 나는 억지로 웃기보다는 화를 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웃으면 복이 와요라며 억지로라도 웃자가 아녔다. 내게 좋은 것만 들이겠다는 것도 아녔다. 의지가 한 식경이 되기도 전에 좌절되었다는 것도 크게 중요치 않았다. 화가 나니 속이 메스껍고, 부들거릴 때 올라오는 닭살과 입술 주위로 몰리는 신경근육에 집중했다. 아닌 척보다 솔직한 분노로 대응했다. 상황이 해결되었냐면 아니다. 앞으로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답변도 아니요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상황에 대처는? 나는 오늘처럼 솔직하게 화내기로 했다. 


화병이란 단어가 있는 한국에만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한국 사회에서 정서상 외면하든 어떠하든 화는 내지 않고 넘기는 게 미덕이란 말일 텐데, 나는 화를 못 내서 병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화를 낸다는 행위가 비호감이어서 그렇지 재채기가 날 때 재채기를 하는 게 자연스럽듯이, 웃음이 나면 미소를 지을지 박장대소를 할지의 차이이지 웃는 건 으레 당연하기에 분노도 정도의 문제지 존재를 부정하는 건 이유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를 내서 속이 시원했냐고. 속은 시원했다. 화를 내서 찜찜했냐고. 화를 들어줘야 하는 상대에게 미안했다. 화내니깐 문제가 해결되었냐고. 문제 해결이 나만 잘하면 되는 건 아니어서 그렇진 않았다. 그럼 이런 물음들이 의미하는 건 뭘까. 생긴 화를 푸는데 이런 이유가 필요할까. 


희로애락 무려 네 번째 안으로 꼽히는 감정이다. 그만큼 잦거나 중요한 감정이란 말이겠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지금까지와 같다면 살아오면서 화낸 일보다 살아가면서 화낼 일이 많을 거다. 다시 한번 다짐하지만,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고 싶지 애초에 못할까 봐 화에 인색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알고 싶다. 화를 푸는 방법까지.


콧볼에서 곡선을 그리는 팔자주름과 미간사이 세로 주름이 분노하는 여러 날을 기억한대도, 눈가와 눈밑 살의 주름이 웃던 여러 날을 기억한대도 레이어드, 층층이 쌓아 올린 그 시간들을 겪어온 내가 있단 것부터 소중히 기억하겠다. 웃상을 만들지, 울상을 만들지는 미정으로 두고 여러 안이 가능한 상태부터 만들어주고 싶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경험부터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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