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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Mar 06. 2024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유

대화의 단서

내가 여성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여자라서? 맞다. 지속적인 호기심은 거기서 기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여자란 이유만으로 공부하기엔 시작이 대단히 오래 걸렸으며, 여자가 아니라도 페미니즘을 공부할 이유는 충분해서다.     


여성운동사를 보면 참정권 쟁취를 위한 투쟁의 역사 이후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로 대변되는 제2의 물결로 이어진다. 그다음으로 (중심으로부터) 주변화된 목소리 -유색인종(백인), 남반구(북반구), 자연(인간 혹은 문화) 등-는 다양한 입장이 ‘교차’하는 페미니즘이 나타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지구는 교차 페미니즘의 시간이다.     


내가 페미니즘에 대한 끌림과 동시에 당황스러웠던 이유는 ‘교차’라는 다양성이었다. 조금 더 분명하게는 다양성의 수용과 포용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이라는 여성학 분야의 저명한 책이 있는데, 책에서 ‘여성 운동의 주체는 여성이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문장의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에 ‘그럼 누가 해? 당연한 거 아닌가?’라고 되묻다가 이내 여성이 주체여야 한다는 선입견에 침묵되어야 했던 대상들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 문단을 읽는 동시에 나의 머릿속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배제된 역사를 떠올린다. 참정권의 획득, 노예제 등 책으로 접한 역사부터 당연히 무임금노동인 줄 알았던 집안일을 해오던 엄마의 모습까지 빠르게 지나간다. 어느 한 일본 영화에서 부부 사이인데 집안일에 금액을 매기고 비용을 치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간에 본 적 없던 장면에 대해 어색함을 느꼈던 나지만, 가사노동이 돈으로 환산되지 못해 이혼 소송에서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과 연결되면 특이하다고 느꼈던 내가 얼마나 안일한 감상이었는지를 알게한다.


여성학이 어렵지만 재밌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런 무지에서 깨어나는 감각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학의 방향성이 다양성을 지향해서다. 이러한 입장은 종교적 가치와도 닮았다. 앞서 언급한 책에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비판할 때 ‘A와 B 말고 C도 있다’는 식의 주장이 아니라 ‘A가 항상 A가 아니다’는 고정불변의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은 불교의 '무아 사상'과 겹친다. 대학생 때 캠퍼스에서 법륜스님의 강의가 열린 적이 있다. 즉문즉답 시간에 한 학생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했고 스님은 생이 앞선다고 대답하였다. 그때쯤에 나도 아침에 눈을 떠야 하는 이유가 뚜렷하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스님의 대답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란 이유로 살지 않기를 선택할 이유도 없다고 받아들여졌다. 사람은 시간과 환경에 달라질 수 있으니 살아만 있다면, 모든 것은 가치롭다고 그러니 살라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의 교차성이 수용과 포용, 나아가 생의 응원으로 읽는다.


페미니즘 공부는 동시에 안전함을 느끼게 한다. 이건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처음 알게되었을 때의 느낌과 유사하다. 베일은 장막인데, 내 머릿속에서는 늘 하늘하늘한 커튼 같은 흰 천이 떠오른다. 무지의 베일이란 바로 이 천에 가려져서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무지)고 가정할 때 선택하는 행위를 말한다. 상황에 기초하여 차이도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관용적인 태도이다. 이런 허용은 혼자가 아닌 사회적 동물, 인간이란 나란 존재에 대해 위안이었다. 나와 너, 우리 모두에게 해당해서 좋았다.


느슨한 연결고리지만, 종교와 철학이 내게 이해되었던 방식으로 여성학은 보다 많은 것을 살펴보게 하고 관심을 가지게 한다.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느끼게 한다. 조금 더 알아보려고 욕심내는 시간이 재밌다. 오늘의 내가 가진 한계에서 나는 나이를 따지는 사람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가장 알고 싶은 정보는 나이이다. 나이를 통해 알 수있는 그 사람의 시대 히트곡이나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사건사고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고, 대화를 나눌 때 –해요, -습니다 와 같은 경어체 형식이 편견으로 자리하고 있다.  틀짓기로 쉽게 얻는 정보는 편안하다. 대신에 지금까지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은 계속 그렇게 존재하게 된다.  한 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것-지금은 페미니즘-은 우연히 지금까지 허용되어서 몰랐던 것, 혹은 허용되는 것만 선택하게되어온 것들을 보여준다.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는 자유의 모습이었고, 수용은 안정감이었기에 누군가들도 그럴 수 있길 바라는거다. 내가 지향하는 바는 되도록 자유와 안정을 늘이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다.


옳다/그르다는 ‘주된’ 입장에 필연적으로 음소거되어버린 소리에 대해서 귀 기울여 보고 싶었던 마음이 헌법에 적혀있는 자유의 모습이었다. 이런 멋진 표현을 쓰게 하는 페미니즘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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