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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Mar 17. 2024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유(2)

대화의 단서

 같은 말을 자꾸 하는 건 다하지 못한 마음 때문이다. 다하지 못했단 이유만으로 하길 또 반복하는 건, 주사도 아니고 새로운 이유가 생겼으니 한 번 더 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신이 났다. 말이 많아서 생각은 더 많고, 그래서 걸리는 것도 많은 내가 걸림돌을 해쳐가며 무언가를 한다는 과정은 순전한 애정이다. 이 애정을 드러낼 수 있음에 감사히 써본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여자여서, 그리고 여자이기에, 여자로서 얻게 되는 경험이 있었고 그것은 자주 알지 못한 형태로, 어쩌다가는 매우 분명한 모습과 이유로, 그리고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타났다. 일례로 엄마가 가장이 되었는데, 집에는 세 명이 사는데 가장이 된 엄마는 왜 일도 하고, 집안일도 모두 엄마만 하는 걸까와 같은 순수한 짜증을 동반하는 질문들이었다. 짜증이 났던 이유는 어릴 때부터 엄마 따라쟁이였던 나는 엄마와 많이 닮아있는데 나도 엄마처럼 살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미안하지만 무서운 마음 때문이었다. 사랑하기에 차마 상대에게 결코 할 수 없는 말로 늘 숨겨야했던 울적한 진심이었다.     


서른에 시작했던 연애가 순조롭지 못했다. 반복되는 문제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기시감 때문에 상대방이 아닌 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는 나의 고민을 듣고 ‘경쟁’이란 단어를 꺼냈다. 이 상황을 조합해서 내린 나의 해석은, 결혼을 염두할 수 있는 관계는 나에게 예상치 못한 불안을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곧 엄마처럼 일도 하면서 집안일도 전담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말이다.      


육체노동은 '그까짓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에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할까 잠깐 생각해 본다.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출근에만 해도 최소 한 시간, 회사일을 탈없이 마치고 와야 저녁 일곱 시. 저녁을 먹고나면 혼자 사는 지금도 여덟 시인데 함께 살면서 조금 더 맛있는 걸 먹으려 정성을 들이고, 함께 먹기 위해 기다리다 보면 같으면 여덟 시, 아니면 아홉 시 열 시겠지. 나는 열한 시면 자는 사람인데 아직 나는 집안 일은 시작도 안했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빨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삼대 이모님이라는 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그래, 그런데 아이를 너무 좋아해서 이십 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처럼 내 아이도 세 명이 크는 환경이면 좋겠다는 그 마음도 있었는데 그 문제는 잠시 다음으로 미뤄보자. 오늘은 다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깐 말이다.     


내게 아빠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서른이 넘은 나에게,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는 근로소득자인 나에게, 퇴직한 지 한참이 지났고, 얼마인지 알기에 더 미안한 노후자산을 '물질적으로 심리적으로 많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최대의 표현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반면 엄마에게는 묻는 말에도 대답을 안 하는 무뚝뚝하고 매정하고 대화하기 싫은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양가감정의 대상이었다. 동성이라는 이유로 예측되는 가까운 나의 미래에 대입되는 어머니에 현실에 아버지가 끼친 영향이 나는 무서웠다. 아빠만의 문제가 아니란 사실은 나를 더 피곤하게 했다.  CC(Company couple)였던 엄마가 결혼퇴직제가 있던 사회가 아녔으면 조금 달랐을까? 이 사람과 결혼하면 고생은 안 할 것 같아서 결혼을 다짐했던 엄마와 다른 교육을 받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내 마음에 비슷한 기대가 드는 이유는 뭘까.  25살, 여러 이유로 결혼을 다짐했을 그녀에게 낭만은 지워버리고 가장 무미건조한 사유만을 남겼고, 안타까운 건 30년 뒤 현실은 그녀의 예상과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건데 나는 왜 보고서도 배운 바 없이, 터무니없는 기대를 크게 하고 있는가다.     


정말 보고 배운 바가 없진 않았다. 이십 대 초중반의 연애와 다르게 삼시대의 연애에서는 ‘경쟁’이란 걸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건 계속하고 싶은 좋은 방향이 아니었고, 지워지지 않은 그 질문들을 책 몇 권을 읽으면서 감상으로 끝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다 싶었다. 그래서 진짜 알게 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여기까지는 누가 물어도 편하게 할 수 있는 대답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유에는 무의식적으로 지워가는 기억들도 있고,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주변 사람에게 낙인찍힐까 봐 두려운 부분도 있다. 지금의 나는 그렇다. 그러나 이미 시작해 버렸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이해하기 싫은 것조차 조금 더 이해하는, 혹은 싫은 것들을 좋게 이해하는 방법들을 배우는 것들일 것 같다.     


오늘도 분명 주말이었는데, 과제를 제출하고 나니 일요일 저녁 6시였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2주 만에 눈꺼풀에 살이 꺼져 노화를 걱정했다. 요즘 밥은 앉아먹는 것보다 서서 먹는 게 당연해지고 있다. 스스로 할 수 있을까를 묻기보다 해야 한다고 인지시키는 때가 는다. 그리고 지금처럼 마음에 있는 글을 쓰기보다 지금껏 관심 가져본 적 없는 분야의 글을 읽고 쉬운 말보다 현학적인 말로 써야 할 것 같은 글쓰기를 해야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는 게 괴롭다.      


그럼에도 잠깐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이 옆길로 샐 때, ‘친구 중에 남사친을 두지 않았던 이유가 내가 이성애 성향이 너무 강했던 탓이었나?’ ‘새로 배치받는 부서에 새 팀장님께 포용, 수용 리더십을 이야기하는 상상은 학습된 여성성 가치인가?’ 와 같은 질문을 하는 걸 보면서 알고싶었던 질문과 비슷한 맥락의 질문이 구체적인 단어로 드러나는 게 신기하다. ‘젠더 문제는 사회 전반에’라는 말을 이렇게 조금씩 이해해 간다. 그러니 재밌다.


가끔 집에 가면, 엄마와 함께 방을 쓴다. 허락된 독방이 없거니와 일 년에 다 합해도 열 흘이 안 되는 날 엄마와 함께 자는 걸 좋아해서다. 그럴 때면 엄마의 아침 루틴을 지켜보는데, 종교가 있는 엄마는 매일 아침 20분 정도 경을 외운다. 경을 외우면서 가족의 건강, 행복 등을 기원하는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경을 외우는데 소원을 빌면 그건 토속신앙 아니야?”라는 엄마의 불경한 마음만큼이나 불똥 튈 소리를 한다.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이웃 사랑, 무아의 경지를 꼭 터득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지난번에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유가 페미니즘의 학문적 태도가 좋아서라 했다. 나의 자유가 중요한 만큼 너의 자유도 중요하다-물론 자유의 제한에서도 그러하겠지만-는 상식에서 이해되는 젠더 해방의 논리와 에코페미니즘, 돌봄 페미니즘 등 사람과 그 이상의 대상으로 확장된 포용의 메시지가 좋았다. 신념에 미치지 못하는 공부이기에 단순히 알게 되는 내용이 이해를 목적으로 하겠지만, 나는 이 학문의 태도를 내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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