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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May 18. 2024

아빠에게

대화의 단서

아빠, 어떤 책을 읽다 아빠가 생각나서 늦은 어버이날 편지로 쓰고 있어. 근데 생각이 너무 많아진 탓에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늘 그렇듯 하고 싶은 말부터 할게. 어제 아침 출근길에 아빠가 생각나서 전화했던 건 복선이었을까.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이 아빠에게 어떻게 와닿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꼭 소리로 전해줘야 할 것 같아서 이미 들었을지도 모를 이 말을 아빠만을 위해서 해볼게.


책에서 ‘접힌 시간’이라는 표현을 봤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흔히 장애가 생기기 전의 과거와 치유될 미래를 자주 생각하게 된대. 그래서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희망 속에서 현재는 접힌대. 그래서 접힌 시간이라 한다네. 그 표현대로면 아빠에게 지금까지 12년 정도가 접힌 시간이었겠다. 아빠는 같이 얘기하다가도 같이 일했던 사람이 지나가면 이렇게 말했어. “점마 내 밑에 있던”으로 시작해서 아빠가 데리고 있던 때 그들에 대한 평가였지. 나는 아빠가 그럴 때마다 참 못마땅했는데 그게 가끔 내 친구의 아빠고 남을 낮춰 부르는 표현을 썼다는 불편함과 함께 언제 적 이야기란 생각이었거든. 나는 아빠에게 그 시간이 접혀있단  전혀 몰랐어.     


근데 아빠의 시간은 왜 접혀있어야 했을까. 대기업의 잘 나가던 차장님, 빠른 승진, 기능장, 그리고 아들 딸, 아내가 있는 가정의 가장. 아빠에게 ‘좋았던’, ‘괜찮았던’ 과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은이는 사회가 몸을 회복해서 ‘다시 건강해지라’ 명령하기 때문이라더라. 그걸 ‘치유폭력’이라고 하더라. 건강하라는 말, 몸 잘 챙기란 말이 인사말인 사회에서 건강한 몸에 대한 신화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채기란 참 힘들어. 그런데 신경이 죽어버린 발을 끄는 아빠에게 다시 예전처럼 걸을 수만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게 폭력이 아니고 뭐겠어. 한쪽 종아리는 무릎 위 허벅지의 굵기와 맞먹지만 다른 한쪽은 팔뚝만큼이나 얇아져서 걷는 폼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고, 걸음이 조금 늦을 뿐인데 그걸 꼭 한번 더 흘깃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아빠의 마음 한 켠자리잡은 불만족감. 그건 사회가 정해둔 엄격한 기준때문일지도 몰라.     


아빠가 나랑하는 대화가 편한 건 어쩌면 장애를 갖기 전이나 후나 아빠를 대하는 내가 똑같아서일지도 모르겠어. 아빠는 다치기 전에 나를 등교시켜 주곤 했고, 다친 후에도 ktx역으로 마중 나오고, 요즘도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해도 꼭 아빠카드로 잖아. 그러니, 내가 아빠가 아파서 퇴직을 했다는 사실보다도 내 친구 아빠를 점마라고 낮춰 부르는 게 더 걸렸나 봐. 아직도 면허 딸 생각을 잘 안 하나 봐. 집에 가면 늘 드라이브를 시켜주는 아빠가 있으니깐.      


책을 읽으면서 내가 장애에 대해 얼마나 감수성이 없는지를 알았어. 너무 없어서 편견조차 없던 게 아빠에겐 다행이었을까. 아빠 마음은 좀 더 편했을까. 어느날 아빠와 했던 대화가 생각나서 내 마음은 한참 무거워져 버렸어. 몇 살 쯤이었는지, 전화를 받던 때가 밤이었는지 낮이었는지, 뭘 하던 중이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그저 아빠의 질문과 내 대답만 어설프게 기억이나. 아빠는 발목 절단을 권한 의사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나는 어느 쪽이든 아빠가 정해야 할 것 같다고 했던 것 같아. 그 말이 아빠에게 얼마나 매정했고 무심했을지, 원망스럽진 않았을지 후회가 돼. 아빠, 내가  너무했어. 미안해.     


그래서 아빠에게 정말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늦은 말이긴 한데, 아빠 발 아파도 괜찮아. 이건 눈떠보니 한쪽 발이 움직이지 않아서 돌팔이 의사를 욕하던 아빠에게 한쪽 발 대신 살아서 다행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달라. 이건 '대신에'가 아니야. 그냥, 한쪽 발이 아파도 나는 아빠가 좋아. 괜찮아. 왠지 한쪽 발이 안 괜찮은 아빠가 어떤지 궁금하지만 지금도 못 물어볼 것 같아서.     


그렇게 부끄럽고도 할 수 있는 말이 몇 개 안돼. 끝으로 정말 결심한 말이 있는데, 아빠 차 고장 나면 내가 언니랑 동생이랑 어떻게 해서라도, 새 차가 어려우면 중고로라도 꼭 마련해 줄게. 그건 꼭 해줄게.

어제 말한 것처럼 아빠 운동하는 모습 아주 좋아, 멋져 멋져. 그리고 알지. 사랑해, 사랑해.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김은정, 후마니타스

서론만으로 아니 추천의 글의 치유폭력을 읽은 것 만으로 충분히 부끄러워졌다. 1장에서 치유폭력에 이전에, 장애, 유전, 우생학 등을 다루는데 장애아동, 낙태, 모성애, 생사여탈권부터 결혼과 출산을 두고 무엇을 우생학인 것과 아닌 것으로 구분할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부끄러운 순간에도 떠오르는 생각을 놓지 않고 따라가며 꼬리질문을 하고, 창피한 줄 알고, 화도 내면서 읽는 게 할 수 있는 것의 최선이자 전부였다. 서론이 한 챕터에 가까운 양이고,  생각과 씨름하다가 1장을 다 읽기 전에 주말 아침, 오전, 오후가 다 가 버려서 멈춰버렸지만, 숱한 질문을 쏟아내게 만드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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