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해가 바뀌었고 어김없이 한 살 더 먹었다. 누군가는 아직 좋은 나이라고 하겠지만 ‘빼박’ 삼십 대 중반이 되어 떨떠름하다.
서른다섯 살은 엄마가 될 거면 빨리 되는 것이 좋다는 암마의 덕담 아닌 덕담으로 시작되었다.
1년 반 전에 결혼을 한 이후에는 줄곧 아이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좋은 소식 있어?"
"이제 슬슬 아이 계획하고 있겠네"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뭐라고 답할지 고민이 된다. 결혼을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고 궁금해할 만한 일인데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결혼 전에는 딩크(double income no kids) 부부가 되자고 했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남편이 내 의견을 따라주어 우리는 딩크 부부가 되었다.
남편은 임신과 출산은 온전히 여자의 몫인 만큼 아내가 될 사람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겠다며, 내 의견이 곧 본인의 의견이라고 해주었고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결혼을 했다. 혹시 결혼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는 것 아니냐며 결혼 직전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내게 그는 백번 가까이 '너와 재밌게 사는 게 목표'라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고, 아직까지 그는 한결같다.
하지만 막상 결혼 전부터 그렇게 딩크 부부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나는 가끔 남편과 닮은 아이가 있는 풍경을 그려보곤 한다.
내게 기대어 곤히 잠든 남편을 보고 있을 때, 둘이서 같이 티브이를 보다가 배꼽 잡고 웃을 때, 그리고 가끔 남편이 지나치게 잘생겨 보일 때 (이것은 분명 몹쓸 콩깍지다!) '이 사람과 함께 부모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고백하건대, 요즘의 나는 남몰래 흔들리는 딩크다.
영원히 아이가 없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엄마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닌 중간 어디쯤 와 있는, 갈팡질팡 딩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아이와 함께 있는 엄마 또는 아빠를 만날 때면 생각이 많아진다.
아직은 결혼 2년 차 밖에 안되어서 당분간은 고민을 미뤄두고 싶은데 주변에서 난임으로 걱정하는 부부가 하나, 둘 늘어나는 것을 보면 여유 부리다 정작 원할 때 못 갖는 것은 아닌가 싶어 이내 빨리 결정을 내리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된다.
나는 왜 결혼 전부터 아이를 갖지 않을 생각을 했을까?
첫 번째로는 어렸을 때부턴 마른 체질에 종종 빈혈로 고생해서 체력적으로 직장생활과 아이를 저글링 할 자신이 없었고, 두 번째로는 아이를 낳아서 느낄 행복감이 가늠이 안되어서이기도 했다. 육아 선배들은 힘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지만, 당장 그 말을 하는 모습에는 피로감이 역력해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언제쯤인가 이렇게 세 번째, 네 번째... 찬찬히 이유들을 나열해 보니, 모든 이유들은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엄마는 강하다고, 엄마는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자식이 아직 없는 나는 무엇이든 다 내어주고 해주고 싶은 대상을 만드는 일이 버겁다.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다. 지금보다 굳이 더 강해지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슈퍼맨이 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돌아보면 엄마는 우리 가족에게 늘 희생적이었다.
아빠와 결혼한 뒤, 박사 공부를 하겠다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갔고 장학금으로 생활하던 가난한 학생 시절에 나를 낳으셨다.
친정이 먼 한국에 있으니 남의 손 한번 빌리지 못한 채 말도 잘 안 통하는 나라에서 나를 키우셨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은 '엄마와 나' 이렇게 단둘이 함께 한 추억들로 가득하다. 아버지가 박사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는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았고, 마침내 분가해서는 거동이 불편하신 증조할아버지를 모시고 지냈셨다.
어렸을 때는 어렴풋이 만 알았지만, 크고 나니 엄마가 얼마나 부지런하게 살았어야만 그 모든 것이 가능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잠깐 잠들어 있는 사이 빨래, 요리, 청소를 하고 내가 깨면 ‘독박 육아’로 고단했을 엄마가 그려진다. 귀국해서는 며느리 역할까지 하느라 모시는 어른들 입맛에 맞춰 아침과 저녁 밥상에 늘 새로운 국과 반찬을 내고, 출근 전 아빠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내 등교 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쌌을 분주한 손이 애달프다.
빳빳하게 다려져 있던 아버지의 와이셔츠와 내 교복 셔츠, 그리고 늘 깔끔했던 집을 생각하면 나는 엄마의 서른다섯이 안쓰럽다. 엄마는 사랑하는 내가 있어서 행복했다고 하시지만 나는 그 시절의 엄마가 내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라 생각해본다.
엄마는 우리 가족을 위해 엄마의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부었고, 엄마의 삶은 곧 나와 아버지를 위한 삶이었다.
엄마는 크면서 바깥일을 하시던 외할머니와는 반대로 집 안에서의 역할에 충실한 엄마와 아내가 되고 싶으셨다고 했다. 방과 후에 집에 오면 엄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서 엄마는 당신 자식에게는 꼭 그렇게 해주고 싶었노라고 하셨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나는 크면서 맞벌이 부모님을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의 하루 일과가 가장 궁금하고, 나의 친구들 이름까지 모두 꾀고 있는 엄마가 가끔은 부담스럽게 느껴졌고, 내심 나도 엄마에게 비밀 하나쯤은 있고 싶었다.
엄마가 내게 할애한 시간만큼이나 엄마는 내게 영향력이 컸다. 고등학교 시절 진로를 결정할 때에도, 대학교 시절 남자친구를 사귈 때에도,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을 정할 때에도 나는 대부분 엄마와 상의하고 엄마의 의견을 따랐다. 외동딸 이서인 이유도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친구들에 비해 나는 유독 부모님으로부터의 정신적인 독립이 늦었다.
20대 때는 엄마와 부딪혔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갈등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내 뜻대로 밀고 나가고 싶은데, 엄마와 의견이 다를 때면 주저하게 됐다. 어린 마음에 내가 엄마에게 전부인 것 같아, 엄마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 어려워 때로는 답답했고 때로는 내게 매진하는 엄마가 버거웠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역할을 엄마로부터 배웠다.
세상에는 다양한 엄마들이 있겠지만, 내 인생에 부모님의 역할이 누구보다 컸기에, 나는 부모가 되는 것이 무겁게 느껴진다.
도저히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자신은 없다. 엄마만큼 가족에서 희생적일 자신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을 자신도 없다.
이기적인 것일 수도 있고 철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엄마에게 받은 것을 손톱만큼도 돌려주지 못했는데.., 아직도 나는 너무나 부족한 딸인데 그 누군가의 엄마가 될 자신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오랜만에 엄마와 다퉜다.
결혼한 지 이제 겨우 1년 반인데, 열 번도 넘게 아이 생각이 없다는 얘기를 반복해서 하게 만드는 엄마에게 짜증이 났다. 딸이 또 한 살 나이를 먹어 걱정되셔서인지 잘 알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는 게 나도 모르게 너무 화가 나 날을 세웠고 엄마를 속상하게 했다.
왜 결혼하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성화냐고, 엄마는 항상 엄마 생각만 다 맞다고 생각한다고... 나이에 안 맞게 떼를 썼다.
그렇게 전화를 뚝- 끊고 쉴 새 없이 눈물이 나서 오랜만에 크게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사실은 엄마 마음도 다 안다.
자식을 낳으면 얼마나 어화둥둥 이뻐할지 아시는 것이겠지. 말하지 않아도 가끔은 사랑하는 남편과 닮은 아이가 있는 풍경을 그려보는 내 마음을 알기에 그러시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는 오늘도 딩크라고 우겨본다.
나는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이미지 출처: Cella Jane Blog,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