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도 지난 1984년 12월 말의 어느 날이었지. 합격자 발표날이 얼마 남지 않아 세상 예민했던 9살 터울의 대입 재수생 형과 열한 살의 난 자잘한 가재도구가 싸인 보따리와 큼지막한 솥단지 하나를 들고 서울역에 내렸어. 그날은 전남 B군에서 떡방앗간과 식당을 하던 우리 집이 서울 이사를 결정하고 일 년에 걸친 준비 끝에 상경을 완료하는 날이었어. 기억에 없는 어떤 이유로 시골집에 쉰밥처럼 혼자 며칠 방치돼 있던 나와 크게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 망설여지는 물건 몇 가지가 형의 진두지휘 아래 마저 다 올라오던 날이었다고 할 수 있지.
춥고 눈 내리고 바람까지 세차게 불던 날이었어. 두툼한 외투를 단단히 챙겨 입고 귀마개까지 했지만 차가운 솥단지를 안아 든 털장갑 낀 손 안으로 칼바람이 쉴 새 없이 새어 들어왔어. 뭐, 한겨울 찬바람을 맞고 걷는 건 그래도 참을 만했지. 진짜 두렵고 무서웠던 건 지독한 차멀미였어.
시골에서만 살았던 난 당연히 버스 탈 일이 많지 않았고 어느 정도의 차멀미는 부끄러울 일이 전혀 아니었지. 그런데...... 무슨 일에나 ‘정도껏’이란 게 있잖아? 귓속 평형관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예민한 후각이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늘 버스를 타고 십 분 정도만 지나면 거대하고 끈적한 구토의 징후가 밀려왔어. 먼지에 뒤섞인 기름 냄새와 불규칙한 강도로 쉼 없이 흔들리는 차체는 언제나 나를 지옥의 문턱까지 데리고 가 속에서 끓어오르던 ‘그것’을, 오, 끔찍하여라, 내 두 눈으로 꼭 확인시켜주고야 말았던 거지.
버스를 탈 때면 늘 잊지 않고 멀미약을 미리 챙겨 먹고 검은 비닐봉지를 준비했던 기억이 나. 그날도 조마조마함의 연속이었어. 다행히 첫 고비였던 읍내까지의 버스 이동은 아슬아슬하게 잘 넘어갔어. 그리고 광주역을 거쳐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기차여행 또한 큰 문제가 없었지. 차멀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기차는 흔들림도 규칙적이고 기름 냄새도 심하지 않아서 멀미를 잘 일으키지 않거든.
80년대 서울역 광장 풍경
사위는 조금씩 어둑해지고 기온도 더 차갑게 떨어진 서울역 광장으로 형과 나는 북적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흘러나왔어. 형은 이사한 새집이 있는 길음동으로 향하는 버스를 잡기 위해 광장 건너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서너 걸음 앞서서 걸어갔어. 그리고 난 뒤처지지 않으려고 잰걸음으로 형 뒤를 열심히 밟아 나갔지.
파국은 피한 거겠지 싶어 어느 정도 안심하고 경계를 풀었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약 기운이 열 시간 이상은 가지 않아서였던 걸까? 서울역과 창경궁을 거쳐 미아리 방면으로 향하는 84번 버스에 형과 올라탄 지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강렬하고 분명한 ‘그것’의 기운이 감지됐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물컹하고 끈적한 상태로 시시각각 목구멍 아래에서 교활하게 모습을 바꿔가던 ‘그것’은 어느새 세상 밖으로 뿜어져 나올 최적의 상태에 도달한 듯 느껴졌어.
결국 안국동 근처에 버스가 정차했을 때 꾸벅꾸벅 졸고 서 있던 형에게 땀으로 범벅인 된 창백한 얼굴로 간절함과 애원의 눈빛을 담아 난 말했지.
‘형, 나 아무래도 토할 거 같아. 지금 내리면 안 돼?’
이 중차대한 비상시국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진중함과 애절함을 듬뿍 담아 형에게 내 끓어오르는(?) 진심을 전달했지만, 전달 오류! 형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눈도 뜨지 않고 말하더군.
‘십 분만 참아봐. 거의 다 왔어.’
어른들의 가장 흔한 새빨간 거짓말, ‘거의 다 왔어, 얼마 안 남았어’를 이해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을까. 난 두세 정거장만 끓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인 ‘그것’을 죽을힘으로 꾹꾹 눌러 참아보고자 다짐했어.
대.참.사. 결국 난 토했고 ‘그것’을 세상 밖, 84번 버스 바닥에 내보내고 말았어. 그제야 놀란 형은 주머니를 뒤져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 보지만, 이미 세상 밖으로 나온 토사물은 세상 곳곳이 궁금하다는 듯 사람들을 가득 싣고 움직이는 버스를 따라 여기저기로 흘러가기 시작했어. 수습 불가. 형이나 나나 당장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지.
버스 안은 혼돈과 경악 그 자체였어. 갑작스러운 이 사태에 놀라 작게 소리를 지르는 사람, 움찔거리며 자기 주변으로 ‘그것’이 흘러오지 않나 발밑을 살피는 사람, 그리고 코를 움켜쥐고 이게 현실일 리 없어, 하는 눈빛으로 솥을 든 소년을 바라보는 사람 등, 버스 안은 대환장 파티였지.
80년대 84번 버스
탈출! 형은 ‘죄송합니다!’라고 꽤 당차고 뻔뻔하게 외치고는 ‘내리자’라고 작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어. 우린 뺑소니범처럼 사고 뒤처리도 없이 버스가 정차해 뒷문이 열리자마자 발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곧장 문밖으로 튕겨 나갔어. 여진이 찾아오려는 듯, ‘그것’의 잔여물들이 식도를 역류해 올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형은 그런 나의 상태는 살펴보지도 않고 씩씩거리며 한참이나 앞서서 이미 걸어가고 있었어. ‘나쁜 새끼’. 난 토사물 찌꺼기가 잔뜩 묻은 입술을 달싹이며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어.
무릎을 꿇은 채 손으로 붙잡고 있던 정류장 기둥을 올려다보니 그날의 역사적 현장을 알려주더군. 비원(祕苑). 이거 뭐 좀 상징적이지 않아? 비밀의 정원에 내 부끄러운 그것의 역사를 묻어 놓으란 것일까. 아니면 결국 추억의 이름으로 아름답게 피어날 소중한 기억이니 일단 잘 감춰 놓으란 것일까.
어쨌든 그날의 난 쪽팔림과 추위, 그리고 끝나지 않은 대참사의 여진을 불안하게 품고 겨우 일어나 형을 쫓아 달려갔어. 아 참, 망할 놈의 이 걸리적대는 솥도 잊지 않고 품고서 말이야.
02.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
눈바람은 더욱 세차게 사선으로 내리꽂고, 쏟아낸 눈물과 콧물, 그리고 토사물이 얼굴에 그대로 들러붙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지. 비원에서 얼마쯤 걸어온 걸까. 꽤 많이 걸어온 거 같은데 길음동은 아직 먼 것일까.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어느 순간 평지가 끝나고 고갯길이 시작됐어. 평지로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웃음기 사라진다는 그 오르막길이 시작된 거야.
고갯길로 들어서고 몇 걸음을 옮기고 맞바람을 피하려고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어 주변을 살펴봤어. 눈발 사이로 끝이 갈고리처럼 굽고 중심에서 옆으로 살짝 기울어진 듯한 붉은 십자가 몇이 깃발에 새겨져 펄럭이는 게 보였어. 언뜻 봐도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를 닮은 듯했고 말이야. 깃발 주변으로 보이는 간판은 죄다 ‘OO사주’, ‘OO예언가’, ‘OO철학관’ 등의 글자를 울긋불긋 새겨놓고 경사진 고갯길 왼쪽으로 쭉 늘어서 있었어. 나중에야 그날 내가 걸었던 그 고갯길이 점집이 군락지처럼 옹기종기 모여든 그 유명한 단장의 미아리고개 점성촌이란 걸 알게 됐지.
1970년대 미아리고개 점성촌
애가 끊어지는 슬픔을 간직한 고개란 뜻인 ‘단장(斷粧)의 미아리고개’를 눈앞에서 보고 있었지만, 그땐 내 애도 끊어지기 직전이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TMI겠지만, 왜 미아리고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일 수밖에 없으며 동명의 노래까지 나왔는지 그 유래를 잠깐 얘기해볼게.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 미아리고개 근처엔 대규모 공동묘지가 형성돼 있었대. 하필 공동묘지가 600여 미터에 달하는 긴 고갯길 너머에 있었으니 상여를 메고 가는 사람들이 이중의 고통을 느꼈을 거야, 아마도. 망자를 보내는 슬픔에서 차오르는 고통에 더해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경사진 고갯길이 주는 고통까지 말이야. 있는 힘을 다 끌어모아 상여를 메고 가던 사람들, 그리고 곡을 하며 뒤따라오던 가족들의 애끊는 듯한 ‘단장’의 슬픔은 육체적이기도 하고 영적이기도 했던 셈이지.
거기다 한국 전쟁 때 많은 이들이 이 고개에서 북으로 끌려가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기도 했고 이후 도시가 커가면서 고개 주변으로 가난한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슬럼가를 형성했다니 별리(別離)의 한과 굶주림의 고통이 고개 마디마디에 스며들어 있을 수밖에. 결국, 이 겹겹의 슬픔과 고통을 담은 표현으로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소름 돋도록 현실적이고 직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어.
한국전쟁 당시 미아리고개
그날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형과 내가 향하고 있던 서울의 새집은 말했듯 바로 이 미아리고개와 맞닿은 길음동이었어. 예전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 잘 모르겠지만 1970년대에 행정구역을 재편하면서 예나 그때나 여전히 가난한 이곳을 길음동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해. 맑고 고운 소리라는 뜻의 길음(吉音). 아이러니하고 억지스럽긴 해도 왜 길음이라고 명명하고 싶었는지, 머리를 맞대고 이름을 지은 이들의 마음이 또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해.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무색하게 뉴타운(New Town)이 되어 온갖 분칠을 하고 우리 앞에 서 있지만 이름으로 다 가리지 못한 근원적 아픔이 서린 그곳, 길음동을 향해 1984년의 내가 힘겹게 한 걸음씩 고개를 넘어가는 중이었어.
어느새 땅거미가 짙게 내린 늦은 오후의 고갯길. 점집들이 뿜어내는 음산한 기운과 잦아들 기미가 없는 매서운 눈바람에 점점 지친 나는 어서어서 그 힘겨운 고개를 넘어가고 싶었어. 다리는 후들거렸고 새빨개지고 얼얼한 볼은 당기기 시작하더니만 아릿한 게 쩍쩍 갈라지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어. 형은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이라 그런지 양손에 든 보따리를 힘차게 앞뒤로 휘저으며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고개를 성큼성큼 앞서 올라가고 있었어. 내가 토하지만 않았다면 형이 좀 더 다정하게 앞으로 살아가게 될 이 동네에 대한 각주를 달아 줬을까. 아니지. 내가 토하지 않았더라도 그날은 나나 형이나 다정하기엔 너무 길고 피곤한 날이었어. 그냥 그뿐이었던 거야.
야트막한 오르막길 경사가 한참 이어지던 고개를 꾸역꾸역 걸어 올라 드디어 난 고갯마루에 다다랐어. 그리고, 거기엔 크고 육중해 보이는 육교가 하나 버티고 서 있었고 그 육교를 기점으로 고개는 내리막으로 바뀌었지. 잠시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아래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봤어.
‘아......’
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작은 탄성 소리를 날숨에 섞어 내보냈어. 눈에 다 담기도 힘들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성냥갑 같은 집과 건물들이 거대하게 펼쳐져 있었지. 어린 내 눈엔 그 모습이 마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고개 너머에서 먹이를 되새김질하며 웅크리고 앉은 거대한 미지의 괴생명체처럼 보였어. 가까이 다가서면 찔릴 것처럼 뾰족한 날을 잔뜩 세운 수많은 인간의 집, 그 사이사이 올이 풀린 털실처럼 꼬불꼬불 펼쳐진 흐릿한 골목, 그리고 난해한 페이지 속 문장의 마침표처럼 곳곳에 자리한 막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교회의 붉은 십자가 불빛...... 내게 이 모든 모습이 신기하고 압도적이었지만 그다음에 밀려온 감정은 사실 복잡하고 무거웠어. 알 듯 모를 듯한 야누스처럼 낯설고도 익숙한 두려움의 얼굴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우리 가족들이 이곳에서 잘 버티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우선 들더군.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엄마의 뇌피셜에 기반한 전언을 종종 들어왔던 내가 저 숱한 사람의 집들 사이를 길 잃지 않고 잘 거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이어졌지. 너무 많은 걸 바라진 못하겠지만 더는 오늘처럼 춥고 어지럽고 메스껍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던 길을 내처 걸어갔어. 이런 내 멜랑콜리하고 답답한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러댔어.
‘빨리 안 따라와?! 버스로 왔으면 진즉 도착했을 텐데, 아 진짜 씨......’
1970년대 후반 미아리고개 주변
형의 고함과 힐난이 마치 격발이 다 끝나지 않은 ‘그것’을 담은 소총의 방아쇠라도 세차게 잡아당긴 듯 ‘못난 새끼’는 참아왔던 ‘그것’의 여진이 순간 속에서 다시 휘몰아치는 걸 느꼈어. 난 다른 생각을 해볼 새도 없이 허둥대며 손에 들고 있던 솥단지를 바닥에 내팽개쳤지. 그리고는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퇴근길의 고갯마루에 양손을 땅에 짚은 채 무릎을 세워 꿇고 앉았어. 단장의 미아리고개에 숱하게 울려 퍼졌을 슬픔의 곡소리에 대한 나만의 오마주였던 걸까? 난 몇 번에 걸쳐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된 채 창자 속 하나하나까지 다 뒤집어가며 애끊는 슬픔의 소리를 닮은 ‘그것’을 꾸억꾸억 토해내기 시작했어.
얼마나 토했을까. 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가고 있었고 겨우 정신을 차린 난 옆에 둔 솥단지를 들고 휘청거리며 일어났어. 그런데, 너무 팔에 힘을 꽉 쥐고 구토를 한 게 탈이었는지 갑자기 양손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어. 그리고는 순식간에 손으로 겨우 들고 있던 솥단지가 바닥으로 스르르 떨어졌지. 아뿔싸!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솥단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눈 쌓여 얼기 시작한 가파른 보도를 굴러가고 있었어.
끼익끼익, 쨍그랑창그랑......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솥단지는 형마저 앞질러 우리들의 목적지인 길음동을 향해 힘차게 계속 굴러갔어. 미아리고개 너머 형과 나의 목적지인,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길음동으로. 그리고 멀미와 추위를 견뎌내고 길고 힘든 여정 끝에 닿은 기쁘고 반가운 소리처럼 경쾌하게 쨍그랑거리며 길음동을 향하는 우리의 솥단지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어.
앞서 걷던 형은 굴러가는 솥단지를 보고 놀라 뭐라고(아마 욕인 듯) 소리치며 미친 듯이 그 뒤를 쫓아갔어. 속도 손도 개운하고 가벼워진 난 형의 그 모습이 왠지 웃기고 귀여워(?) 보여서 그날 처음으로 뒤에서 활짝 웃었던 것 같아. 그리고 내리막길 위에 걸린 교통 표지판에서 난 드디어 봤어. 거친 눈발과 한 줌 남은 희미한 날빛 속에서도 분명하고 당당히 적힌 ‘길음동’이라는 세 글자를. 그리고 난 스스로 감격에 겨워 속으로 말했지.
‘드디어, 결국, 다 왔구나. 길음동, 앞으로 잘 좀 부탁해!’
조지오웰(George Orwell)에겐 도래하지 않은 디스토피아였고 백남준에겐 찬란한 미래에 대한 희망의 찬가였던 1984년. 나에게 1984년은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저 두 번의 구토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어. 온통 얼어붙고 차가운 인사만을 건네는 세상의 문 앞에 선 그날, 애처로운 열한 살의 나에게 할 수만 있다면 무심한 듯 다가가 등 한번 쓱 쓰다듬어 주고 싶네, 너무 애쓰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견뎌보자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