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돌산. 큰 돌산. 길음동에는 돌산이라 이름 붙여진 데가 이렇게 두 곳 있었어. 그리고 두 곳 모두 길음동을 대표하는 산동네였지. 미아리와 길음동 일대가 원래 잘 사는 동네가 아닌데 그 안에서 또 이런 이름들로 ‘더 가난함’의 표딱지를 붙여놓았던 거지.
서울로 이사한 우리 가족이 거처를 마련한 곳은 작은 돌산이었어. 엄마가 밀어붙여서 산 작은 돌산의 무당(이 살았던)집은 형편없어 보였어. 음, 그냥 여기 사는 사람들 열라 가난하니까 그런 줄 알아, 하고 말하는 듯한 가난의 징표들이 집 안팎으로 가득 보였어.
· 여기저기 금이 간 회색 슬레이트 지붕과 갈라진 외벽
· 곳곳이 담뱃재 구멍 투성이인 장판과 검푸른 곰팡이가 천장까지 뻗어 올라온 낡은 벽지
· 검게 그을린 석유곤로와 부실해 보이기 짝이 없는 연탄아궁이
· 수직으로 이어진 작은 돌산의 암벽 위 위태로운 창문 하나
1980년대 길음동 달동네
시골에서야 떡방앗간과 식당도 운영했으니 딱히 부자라고 할 건 없지만, 그렇다고 궁상맞고 가난한 집도 아니었을 거야. 화단마저 있는 널따란 앞마당, 식당과 방앗간 건물에 방이 셋, 뭐 이 정도면 전남 B군에서 중산층 정도는 됐을 거야. 그런데 상경하자마자 순식간에 우리 식구는 공동화장실을 쓰는 산동네 주민이 되어버렸네. 한두 계단도 아니고 아예 신분 사다리의 발판 저 아래까지 주르륵 미끄러진 꼴이 된 거지.
엄마는 매일같이 리어카를 끌며 길음 시장에서 소독약을 팔고, 아빠는 인천에 있는 한 공장의 자재 창고에서 경비 일을 하면서 열심히는 돈을 벌었어. 하지만 가난은 징글징글하게 우리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을 예정이었지, 한동안 쭉 말이야.
1985년, 난 국민학교 6학년이 됐어. 미리 자란 키 덕분에 60명이나 가득 담긴 교실 뒤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어정쩡하게 방치된 채 조용히 지낼 수 있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방치를 선택했다고 해야겠네. 걱정거리가 하나 늘 있었거든. 길음시장에서 행상하는 할머니로 보이는 엄마의 존재.
늘 이 걱정거리 때문에 가끔 말을 먼저 걸어오는 아이들한테도 시큰둥하게 굴었던 거 같아. 친구를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친구란 게 밥도 같이 먹고 학교 끝나면 집에도 같이 가고 또 가끔 서로의 집에도 놀러 가고 하는 사이니까, 난 그런 걸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초라한 작은 돌산의 무당 집도 보여주기 싫었고, 할머니로 보이는 엄마가 길음시장에서 소독약을 팔고 있는 모습도 보여주기 싫었거든.
학교가 끝나고 혼자 집에 가기 위해 학교에서 시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들어서면 늘 가슴이 콩닥거렸어.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엄마가 오늘은 어디쯤 있을까? 혹시 마주치면 어떡하지? 엄마랑 함께 있는 모습을 같은 반 애라도 보게 되면 어떡하냐고? 참, 한심하고 불효 막심한 걱정거리였지만, 그 당시 나에겐 이 이상으로 거대하고 심오한 삶의 고뇌는 없었던 것 같아.
그래도 공부는 그럭저럭 잘했을 거야. 근데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마녀처럼 심술 가득한 얼굴을 하고 상처 주는 말만 콕콕 잘도 해대는 담탱이가 그 주인공이었어. 심하게 마른 몸에 늘 푸석푸석해 보이는 파마머리를 하고 다니던 40대 중반 여자 선생이었는데 나쁜 교육의 표상이 되어 아이들을 매일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학대했지.
날마다 봐야 했던 수학 쪽지 시험 점수가 형편없는 아이들을 정규 수업이 끝나고도 남겨서 나머지 공부를 시켰는데 일주일마다 바뀌는 일종의 마니또가 같이 남아서 도움을 줘야 했어. 마니또가 누군지는 시험을 망쳐봐야 알게 되는 시스템이었던 거지. 좀 낭만적인가? 마니또가 누군지 궁금하면 시험을 망치면 되는 건데 그게 궁금해서 일부러 망치기엔 그 대가가 혹독했어.
기준 미달의 점수를 받은 아이들은 교탁 앞에 둘씩 짝을 이루고 서서 뺨 싸대기를 몇 차례씩 서로 주고받아야 했으니까. 이거 거짓말 같지? 이상한 나라의 판타지 같지? 요즘의 인권 감수성으로 보자면 아동 폭력이요 형사 처벌감이긴 한데 우리 반에만 딱히 마녀가 있었던 것도 아녔어. 마녀뿐이겠어. 게슈타포도 학교에 상주한단 얘기가 있었으니까.
문제는 일 년 내내 이런 끔찍한 장면을 보다 보면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하고 심상한 일상 풍경이 돼버린단 거지. 싸대기와 온갖 수치스러운 상황에 단련된 그때 우리 반 아이들은 해병대에 당장 입소했어도 아마 일주일이면 적응했을 거 같아.
나도 어쩔 수 없이 마니또 역할을 하며 늦게까지 학교에 종종 남아 있곤 했어. 처음엔 열정적으로 내 못난 마니또의 수학 시험지를 붙들고 멘토 역할을 충실히 했지.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나도 무뎌지고 못돼졌어. 나머지 공부까지 받았는데도 다음 날 또 마녀 옆에서 다른 아이와 뺨을 내놓고 서로 따귀를 때리고 있는 마니또를 보고 있으면 한심한 생각이 먼저 들기 시작했던 거야. 내가 더 잘 가르쳐주지 못해 또 저 안타까운 무대 위에 섰구나, 하는 미안함과 속상함보다, 젠장 오늘 또 집에 늦게 가겠군, 이런 생각이 먼저 들게 되더라고.
나쁜 교육은 결국 평범한 우리 모두를 나쁜 인간으로 개조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걸 경험했던 거지.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란 게 이런 걸까 싶기도 해. 경주마처럼 주어진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생각다운 생각을 할 힘은 퇴화해버렸고, 그저 시스템이 알아서 잘 굴러가도록 충실하게, 너무나 정직하게 주어진 임무만을 해내고 싶은 마음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 악의 뿌리를 들어내기보다 시스템 속에서 최선을 다해 순응하는 것. 겨우 열두세 살이던 아이들에겐 너무나 잔인한 마녀의 교실이 거침없이 폭주하고 있었어.
1980년대 초등학교 교실
마녀는 수학을 망친 아이들만 망쳐놓지 않고 (한때) 수학 좀 꽤 한 나에게까지 그 마수를 뻗어 오기 시작했어. 피해의식과 열등감은 스스로가 만든 마음의 상태일 뿐이라지만, 그걸 응원해주는 마녀 같은 선생이 때마침 옆에 있어 주면 더욱 힘차게 바닥으로 추락하게 돼 있는 법. 안 그래도 눈에 띌까 감춰둔 가난의 기표들이 불쑥 바지 속 송곳마냥 어딘가에서 뚫고 나올까 전전긍긍하던 나를 마녀는 끊임없이 뒤흔들어 놓았어.
우리 반엔 수학 좀 하는 남자아이가 둘 있었지. 한 명은 반장이었던 S,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예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나. S 그 아이는 걱정거리 없는 집에서 예쁨 받고 잘 자란 듯 구김살 없이 해맑고 장난기도 많은 아이였어.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한데 안타깝게도 S는 공부뿐 아니라 또렷한 이목구비의 잘생긴 얼굴까지 타고났으니 엄친아, 아니지 마친아(마녀의 친구 아들)였던 거지. S의 엄마가 마녀랑 꽤 친한 친구였나 봐. 그래서 마녀는 S를 제자나 학생이라기보단 절친의 아들로서 애정과 사심을 가득 담아 애들 앞에서 대화를 나누곤 했지.
‘엄마는 오늘 뭐 하시니?’
‘S야,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
‘어머, 엄마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S는 엄마한테 백 점 맞았다고 또 칭찬받겠네, 호호호’
내가 다니던 1985년의 국민(초등)학교에선 거의 매달 하순쯤 교내 수학 경시대회가 있었어. 그리고 며칠 내로 그 결과가 곧장 담임에게 통보되곤 했지. 우리 반에서는 수학 잘하는 S와 (또 예상하신 대로) 내가 늘 백 점을 받았다는군. 그리고 우리가 백 점을 통보받은 다음 날엔 어김없이, 과일과 과자로 가득한 박스가 몇 개씩 교실로 배달되어 오곤 했어. 물론, 우리 엄마가 아닌 S 엄마로부터. 마녀는 늘 타협할 수 없는 대단한 의식이라도 거행하는 것처럼 박스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어.
‘S네 엄마가 또 뭘 보내셨지 뭐니, 호호호. 다들 S한테 고맙다고 해~. 박수! S 씨, 박스 한 번 뜯어보세요~. 지지배, 이번엔 또 뭘 보낸 거야? 호호호’
박스 쪽으로 친히 걸어 나온 S는 의기양양하게 박스의 테이핑을 뜯고서 (이미 알고 있었을)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놀랐다는 듯, 약간은 격앙된 톤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어.
‘선생님, 사과요!’
‘선생님, 귤이네요!’
‘선생님, 맛동산도 있어요!’
‘선생님, 초코파이군요!’
의식이 끝나면 S는 위풍당당하게 자리로 돌아가고, 우리 반의 일꾼들인 부반장과 분단장 등이 나서서 일사불란하게 하사품을 60분의 1로 나눠 아이들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어. 자식이 매월 보는 시험 좀 잘 봤다고 한 번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간식을 학교에 돌린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그 당시의 국룰에도 맞지 않는 희귀한 풍경이었긴 해. 매번 이어지는 이 돈지랄 파티에서 홀로 웃지 못하고 좌불안석이었던 사람은? 당연히 나였지. ‘마녀님, 사과(또는 귤, 또는 맛동산, 또는 초코파이, 또는, 또는, 또는...) 돌리기는 국룰이 아니오니 미천한 저에게는 절대 강요치 마시옵소서, 제발!’ 맘속으로 거듭 기도하듯 속으로 외쳤지만,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그 현실은 우려했던 것보다 더 아팠어.
마지막 수학 경시대회가 11월 말에 있었고 늘 그랬듯이 S와 내가 또 백 점을 받았어. 제발 이번에만 잘 넘기자 싶었어. 변함없이 S의 모친은 백 점 통보를 받은 며칠 후 아직 철이 일러 푸릇한 기운이 감도는 비싼 귤 몇 박스를 교실로 보내왔어.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 하사품 전달식이 차근차근 정해진 프로세스대로 충실히 진행되던 도중, 예상치 못한 돌발 메시지가 마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어. 그 메시지는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고.
‘근데, 청진이 엄마도 마지막인데 귤 한번 돌리셔야 하는 거 아냐? 얼마나 한다고(?) 이렇게 얻어먹기만 할 거야? 백 점을 일 년 내내 받아놓고서 너무하다 얘! 백 점 받았다고 애들한테 박수만 받고 입 딱 씻을 건 아니지? 호호호.’
마녀는 마치 악성 장기 체납자라도 뜻밖에 발견한 듯 어린 내 눈에도 분명히 보이는 경멸 섞인 비웃음과 힐난을 나에게인지 엄마에게인지 그도 아니면 우리의 공통분모, 가난을 향해서인지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어.
누가 박수 쳐 달라고 애원했어? 누가 S 엄마에게 거지처럼 먹을 거 구걸이라도 했냐고? 안 체한 게 다행이지! 미치지 않고서야 집에서도 자주 못 먹는 귤을 꼴랑 수학 백 점 받았다고 박스째로 학교에 사 들고 오라는 말을 어떻게 엄마한테 하냔 말이야. 소독약 팔아 번 돈으로 귤을 사다 나르라고? 안되지.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난 속으로 이런 말들을 끝없이 쏟아냈지만 정작 입은 떨어지지 않았어. 그저 마녀가 쏘아붙이는 말을 견디며 책상 위에 올려진 탱탱한 귤만 응시한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지. 이건 나의 투쟁, 난 흔들리지 않을 테다!
하지만 그런 내 의지와는 반대로 얼굴은 어느새 책상 위 귤처럼 푸르락누르락해지고 이미 차오를 대로 차오른 눈물은 흘러넘치기 직전이었지. 눈에 고인 눈물을 어떻게든 들키지 않기 위해 난 재빠르게 손으로 꾹꾹 두 눈을 눌러 문질렀어.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분명히 온몸으로 난 흔들리고 있었던 거지.
영원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난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겨우 참아내며 고개를 들었어. 마녀의 시선은 여전히 날 향해 있었고 답을 기다리는 듯했지. 난 지지 않을 태세로 잠시 마녀의 눈을 바라봤지만 결국 동공지진...... 어울리지 않는 분홍 립스틱이 두껍게 발라진 입술을 흉하게 한번 삐쭉 내밀고 옆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녀는 묵묵부답인 나를 채근하듯 계속 뚫어져라 바라봤어.
항복.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내 자존심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링 한가운데로 수건을 던지는 코치의 심정이 되어 고개를 떨구며 난 마녀에게 말했어.
‘네, 선생님.’
대답을 기다리던 백 개가 넘는 눈, 그리고 마녀의 그 집요함에 어쩔 수 없이 난 투항하고 말았어, 일단은. 그 분위기에서 ‘우리 집은 너무나 가난해서 안 됩니다’ 같은 말을 감히 내뱉지 못하겠더라고. 하지만 당연히 귤 이야기를 엄마에겐 하지 않을 작정이었어. 어차피 엄마한테 얘기 못 할 거, 몇 달만 버티면 곧 졸업이니 단단히 맘먹고 한 번 더 버텨보기로 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