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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진 Apr 05. 2022

1985 : 나쁜 교육 #02

02. 나쁜 교육, 폭주하다

 마녀의 조공 압력을 꿋꿋이 잘 버티던 중 예기치 못한 곳에서 사달이 났어. 근근이 버티던 나를 테이크다운 시킨 한 방이 찾아오고야 만 거야.

 마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며 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사교계의 왕자처럼 늘 떠받들어지던 상위 1 티어, 아니 0 티어였던 S에게 난 눈엣가시였나 봐. 같이 안 떠받들어줘서? 나도 생길 만큼 생겼고, 수학도 똑같이 백 점인데 왜 때문에 널 떠받들어? 내가 일부러 한두 개라도 틀려줘야 하나? 똑똑한 걸 어쩌겠니. 설마하니, 혼자서만 하사품 뿌리는 게 아깝고 분했나? 에이, 설마......


 어쨌든 일이 터졌어. 아주 큰일이. 마녀의 애제자 S를 내가 패줬거든. 전후 상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고, 정강이를 내가 걷어찼던 이유만은 확실히 기억나. S 녀석이 지역감정을 가지고 도발을 하더라고. 예나 지금이나 지역감정은 쌈질과 폭력의 근원인가 봐.

 ‘너 전라도에서 왔다며? 근데 왜 사투리를 안 쓰냐? 전라도 욕 좀 해봐! 하하하’

 아쉽게도 난 전라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어디서나 통할 국가대표급 욕인 ‘씨* 개새끼야’를 면전에 날려 주고 곧장 S의 조인트도 한 대 까줬지. 왜냐고? 왜 그렇게 오버를 했냐고? 난 그때 분명 봤거든. 미세하게 S의 한쪽 입꼬리가 씰룩 올라가며 ‘경멸’이란 단어가 얼굴에 활자처럼 분명히 쓰여있는 걸 말이야. 그건 마녀가 날 채근할 때 보여주던 종류의 뾰족하게 아픈 경멸의 비웃음과 일란성쌍둥이처럼 똑 닮아 있었지. 봤다면 남자답게 응수해줘야지. 그래서 깠어! 시원하게 S의 조인트를.

 ‘씨* 개새끼야’

 퍽!


 교실은 S의 비명과 울음소리에 난장판이 됐어. 쉬는 시간이었나, 아니면 점심시간이었을까. 어쨌든 사건 현장에 마녀는 없었고 이 조인트 가격 사건의 전말은 수업 시간이 되고서야 마녀 귀에 들어갔을 거야. 마녀의 최애템 체벌인 싸대기라도 몇 대 맞고 끝났다면 이 사건은 잊힌 슬픈 에피소드가 되었을 텐데, 인간의 나약한 마음길을 너무 잘 아는 우리 마녀님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셨지.

 마녀는 앞으로 부르기도 하찮다는 표정으로 날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더니 주술을 읊듯 낮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얘기했어.

 ‘공부도 좀 하고,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해서 순진한 줄 알았는데, 너 깡패니? 얻어먹었으면 고마워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지, 어떻게 다른 애도 아니고 니가 S를 패, 어!?’

 난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듯 피비린내가 나도록 혀를 깨물면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았어. 그렁그렁, 툭하면 터질 것 같은 봉선화 연정도 아니고 절대 눈물 같은 건 보여선 안 된다고 다짐하며 입안에 핏물이 고일 정도로 미련하게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지.     

 이 일로 반성문 몇 장 쓰고 S에게 사과도 했을 거야. 며칠간 방과 후엔 남아서 화장실과 화단을 쓸고 닦았던 기억도 나고. 다행히 엄마 호출은 없었어. 세상에나, 처음으로 마녀에게 감사하더군. 어쨌든 이 일이 꼭 나쁘기만 했던 건 아냐. 그 사건 이후로 아이들이 내 눈치를 꽤 살피더라고. 나로서는 딱히 나쁠 건 없었지. 시장에서 마주쳐 말을 건넬 친구가 생길 기회는 이제 영영 사라진 거니 이 얼마나 다행이야.




 이 사건이 있고 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네. 아마 12월 초였던 것 같긴 해. 아침 조회를 위해 마녀가 들어서는데 옆 반 남자 선생님이 웬 박스 두 개를 들고 같이 들어오네. 교탁 옆에 그걸 두고 남자 선생님은 옆 반으로 갔고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마녀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지. 수학 경시대회를 나만 빼고 또 본 건가? S 엄마는 이제 시도 때도 없이 하사품을 보내기로 결심이라도 한 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녀가 생긋거리며 말하더라고.

 ‘연세도 꽤 있어 보이시던데, 세상에 청진이 어머니가 교무실로 귤 두 박스를 머리에 직접 이고 오셨지 뭐니.’

 마녀는 여기까지만 말했어야 했어. 제발 그래 주길 간절히 바랐고. 하기야, 그랬다면 마녀답지 않은 너무 뻔한 캐릭터였겠지?

‘청진아, 그런데 어떡하지? 내가 어머님께 실례를 했어. 난 청진이 할머니인 줄 알고 실수로 할머니 되시냐고 했지 뭐니, 하하하. 마흔에 7남매 중 막둥이로 널 낳으신 거라면서? 7남매라니 웬일이야, 하하하. 고생 많이 하시는데 중학교 가서는 애들 때리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기다?! 하하하. 자, 부반장하고 각 분당장들 나와서 귤 좀 돌려라. 두 개씩은 돌아가려나? 어쨌든 청진아 드디어 잘 먹을게! 다 같이 청진이한테 박수~’     

 마녀는 나에게 너무나 길고 고통스러운 말들을 이렇게 쉼 없이 줄줄 쏟아냈어. 그리고 박수를 치던 아이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지. ‘와~짝짝짝, 킥킥킥, 우~짝짝짝, 크크크, 헉~짝짝짝, 풉풉풉...’

 이 순간, 바로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이 내 열두 살 인생에서 가장 모멸스러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고생 많이 하시는데’라는 말은 내 머릿속에서 이렇게 자동 번역되어 들려왔어.

 ‘작은 돌산에 사는 가난한 청진이 엄마가 시장에서 리어카 행상으로 소독약 팔아 번 돈으로 귤까지 사느라 고생 많이 하시는데’

 참,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가 귤 상자를 이고 학교로 찾아오게 된 건 같은 반의 ‘H’란 아이 때문이었어. H는 나랑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엄마끼리도 교회를 통해 알고 지내는 사이였거든. 아마도 H가 자기 엄마에게 ‘조인트&귤’ 사건을 미주알고주알 다 말했었나 봐. 작은 돌산으로 이어지는 비탈길 초입에서 작은 식료품 가게를 하던 H 엄마는 가게에 들른 엄마에게 이런 말을 아마 하지 않았을까?

 ‘어휴, 집사님! 마침 잘 왔어. 두부만 사가지 말고, 귤 좀 두어 박스 넉넉하게 사가. 청진이가 말 안 했지? H가 그러는데...’


03. 새드 웨딩

 마녀는 내게서 둘째 누나의 결혼식을 지워주는 것으로 나쁜 교육의 대미를 장식해 줬어. 그리고 내 인생에서 영원히 박제되는 길을 선택했지. 겨울방학을 코앞에 둔 12월 하순의 어느 수요일이었을 거야. 그날 오후 둘째 누나의 결혼식이 길음동의 한 예식장에서 있었어. 예식 시간은 한 시쯤이었나 봐. 보통 주말에 결혼식이 잡히는데 왜 수요일에 예식장을 잡았는지, 그때는 모르고 지금은 너무 잘 알고 있지.

 어쨌든 난 학교를 빠질 수 없어서 오전 쉬는 시간에 미리 마녀에게 오전 수업만 듣고 조퇴를 하겠다고 말을 했어. 마녀는 쏘쿨~하게 허락을 해주더군. 난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가방을 챙겨 학교를 빠져나가려고 마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마녀는 밥만 우걱우걱 처먹고 있는 거야. 아, 그때는 급식이 없던 때라 교실에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함께 밥을 먹는 경우가 흔했어. 마녀도 보통 교무실이 아닌 교실에서 점심을 먹었을 거야. 째깍째깍, 시간은 흐르고 결혼식은 이미 시작됐을 거 같은데 도통 마녀는 가보라는 말이나 사인을 보내지 않네.

 사실, 이러저러한 소동 이후로 웬만하면 반에서 튀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느라 침묵리우스 행세를 하던 나도 다급한 마음에 마녀의 밥상 쪽으로 다가가 다시 한번 얘기를 꺼냈어.

 ‘선생님, 저...... 누나 결혼식이라......’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호들갑을 떨면서 마녀가 크게 지껄여대기 시작했어. 분명 의도를 가진 나쁜 말들을.    

 ‘아, 맞다. 얘들아, 오늘 병국이 누나가 결혼식이래. 그래서 조퇴할 거야. 축하의 박수~.’

 거참, 박수 한 번 오지게 좋아하는 마녀네. 전혀 주목받고 싶지 않던 난 이마가 서늘해지는 게 뭔가 불길한 예감이 찾아드는 걸 감지할 수 있었어.

 ‘세상에, 누나랑 몇 살 차이길래 벌써 누나가 결혼한대? 아, 맞다. 어머니가 나이가 좀 많으셨지.’

 마녀는 언제부터 우리 가정사에 이리 관심이 많았던 걸까. 어쨌든 이쯤에서 난 (소심한 반항으로) 대답은 생략한 채 인사를 하고 교실을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마녀는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어.

 ‘근데 무슨 결혼식이 주말도 아니고 수요일 낮이니? 결혼식인 거 확실하지? 내일 학교 올 때 청첩장 하나 가져와. 알았지? 얼른 가 봐 그럼.’

 아이들은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마녀와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어. 마침내 교실을 빠져나가려고 가방을 들고 교실 뒷문 쪽으로 향하다 젖살이(심술살일지도) 덜 빠져 볼이 빵빵한 여자애 하나가 불쑥 다 들으라고 이런 말을 내뱉더라고.

 ‘징그러워, 쟤 곧 삼촌 되는 거야?’

 ‘사실 나, 이미 삼촌이거든!’이란 말은 굳이 그년에게 내뱉지 않고 난 고요히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어.    

  

 교문을 나서자 분명 점심시간 전에만 해도 쨍쨍 맑았던 하늘에서 잔뜩 불린 찬 밥풀 같은 눈송이들이 내려오고 있었어. 얼마나 내렸던 걸까. 눈이 쌓이기 시작한 운동장은 발자국 하나 없이 순백의 얇은 화선지처럼 내 앞에 깔려 있었지. 눈 때문인지 운동장에는 평소처럼 점심을 빠르게 해치우고 나와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난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직 내 발자국만으로, 다른 누구의 것도 섞여들지 않은 나만의 길을 내며 교문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당당히 앞만 보며 걸어갔어. 뒤돌아보면 왠지 커튼을 살짝 들친 예의 그 싸늘한 비웃음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마녀와 눈이 마주칠 것만 같았거든.

 ‘돌아보면 지는 거다. 흔들려도 지는 거다. 청진아, 뚜벅뚜벅, 꼿꼿이 걸어야 해!’

 맘속으로 이 말을 되뇌며 난 걷고 또 걸었어. 운동장은 마치 마녀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끝없이 늘어나고 있는 듯했지. 그 순간 아마 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시간은 모두 다르게 흐르고 내가 걸어가던 그날의 운동장에선 유난히 더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럼에도 기어코 마법을 풀어야 하는 동화 속 왕자라도 되는 양, 뒤돌아보면 곧장 소금기둥으로 변하기라도 할 것처럼, 난 입술을 꽉 깨물고 눈 덮인 운동장을 천천히 밟고 걸어가 마침내 교문에 다다랐어. 그리고 교문에서도 한참을 더 걸어 나오고 더 이상 마녀의 교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이제 그만 긴장을 풀라고 몸이 신호를 보내왔어. 신호를 접수하자마자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내 온몸은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와락 주저앉을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지.

     

 ‘미아리 극장 지나서 사거리 큰 길이 나오면 시장 안쪽 길 말고 미아리고개 방향 오른쪽으로 쭉 오 분만 걸어와. 찾기 쉬울 거야.’

 막둥이라고 엄마처럼 늘 챙겨주던 작은누나는 분주한 결혼식 날 아침까지도 길치로 여러 번 판명 난 막둥이가 길을 못 찾을까 봐 이렇게 두세 번에 걸쳐 예식장 오는 길을 알려줬어. 길어야 삼십 분이라던 예식 시간을 생각하며 종종걸음으로 미아리 극장이 보이기 시작한 내리막 비탈길을 서둘러 걸어갔어. 눈발은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지만 우산 없이 걷는 내 어깨와 머리 위로 눈이 쌓이고 있는 게 느껴졌어.

 그리고 세상은 가는 눈발과 먹구름 아래 온통 잿빛. 문득 길은 사라지고 난, 길을 잃었지. 아니 잃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어. 왠지 이런 기분으로 결혼식장에 도착하면 막돼먹은 애처럼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한바탕 울 거 같았거든. 결혼식의 주인공은 작은누나인데 버르장머리 없는 막둥이가 주인공이 될 순 없는 노릇이잖아. 그런 상념에 빠져 난 무작정 걷고 또 걸었어, 어디로 가는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미아리 극장은 분명 지나쳐 온 거 같은데......’

 걷다 보니 길음시장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또 걷다 보니 학교가 저 멀리 흐릿하게 눈발 속에 다시 보였어.

 ‘아, 난 오늘 진짜 틀렸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뜨겁게 데워진 뭔가가 명치께부터 거침없이 위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어. 오재미만 한 딱딱한 덩어리 같은 그것은 아무리 용을 쓰고 눌러도 소용없이 목구멍까지 이르고 말았어.

 이상하지. 그 뜨거움에 데일 것 같아 헉, 하고 숨을 한 번 내뱉었을 뿐인데 엉뚱하게 눈물샘이 부풀어 올랐어. 그다음, 홍수에 수문 열리듯 뜨끈한 눈물이 과속 방지턱처럼 버티고 선 광대를 넘어 거침없이 빰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하더군.

 ‘그래, 여기서 이렇게 울면 아무도 모를 거야. 걸어가면서 좀 더 울다 집으로 가자. 그냥 집으로 가자. 너무 피곤해. 너무......’     

 작은누나의 결혼식 날 오후는 울기에 참 좋은 날이었어. 누군가 눈발 속에서 으깨어 놓은 누런 연탄재가 깔린 작은 돌산 비탈길로 올라선 뒤 연두색 낡은 공중전화를 지나치자 어느새 난 울음 대신 숨이 차 왔어. 그리고 이십여 미터쯤 더 올라가다 왼쪽을 멈춰 바라봤지.


 희끗희끗 나리는 눈발 속에서 위태롭게라도 결국, 끝끝내 버티고 서 있는 의외로 단단한 우리 집이 보였어. 우리 집이라 부끄러웠지만, 부끄러워도 우리 집이라는 게 있어 참 다행이었지. 숨어서 맘껏 혼자 더 울 수 있는 세상 끝 우리 집에 드디어 도착한 기분이었으니까. 울며불며 난리를 친다 해도 따져 묻지 않고 내 울음을 그대로 묻어 줄, 그 우리 집이 있어서 참말로 운수 좋은 날이었어, 그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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