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1
# 헤르만헤세 저, 데미안을 읽고 쓴 글.
나는 카인의 후예다. 이 책을 읽고 그렇게 자신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만큼 헤르만 헤세의 문장은 높은 산골짜기처럼 깊고 아득하다. 주인으로 사는 삶의 무게와 아브락삭스의 자유와 고독에 대한 갈등과 투쟁을 이렇게 탁월하게 묘사하는 작품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스무 살 문턱에서 실제로 '데미안'을 만난 적 있다. 아 참, 내가 붙인 데미안의 아명이 따로 있다. 바로 '발렌타인'.
나는 발렌타인을 통해 깨어났으며, 자유와 고독을 감당해야 하는 운명을 감히 맞닥뜨린다. 이마에 카인의 표식은 선명해졌고, 돌이킬 수 없었다. 진정한 경험은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라 했나.
우리는 절절하게 사랑하는 만큼 서로를 미워했다. 동시에 돌아갈 영혼의 집을 잃었다는 수치와 자괴감에 알을 깨고 나오자마자, 그를 목 졸라 숨통을 틀어쥐고는 멀리 쫓아냈다.
나는 그토록 사랑하던 이를 직접 상처 낸 대가를 치르느라 피가 철철 넘치는 두 손을 숨긴 채 도망쳤다. 마주친 운명의 강을 넘어, 드높은 자유가 파도처럼 범람하는 투쟁의 바다로 향하는 일을 거부했다. 쫓기는 탕아가 삶을 구도하는 것처럼, 덜덜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철저하게 아벨의 삶을 살고자 했다. 지난날 내 간난한 삶에 대한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 내가 한치도 알 수 없는 미래를 지탱할 힘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과연 그 대가는 참혹했다.
형체 없는 공포에 시달려 방황했으며, 내 질겁한 모습을 거울삼아 이를 갈았다. 자기 연민과 혐오를 씨실과 날실로 엮어 새까만 그물을 만들어 내 몸을 칭칭 감고, 한 발 짝도 움직일 수 없는 나약한 정신을 만드는 데에 온몸과 마음을 다했다. 다가온 운명에 휩쓸리기 무서워 저항하던 그 세월, 내 이마에 카인의 표식은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숨이 막혔다. 그물에 감겨 꿈적도 하지 않는 내 몸뚱이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리라 짐작했다. 이대로 내 작동은 멈추는가.
그런데 좀 억울했다. 지금 내가 겪는 이 비루함과 그때, 질식할 것 같은 운명을 거부한 대가로 겪은 고통이 과연 뭐가 다른가.
한번 깨어난 새는 다시 알로 돌아갈 수 없다. 내 마음 바닥보다 더 아래를 들춰 보고 나니 깨달았다. 남은 것은 견디지 못했다는 분노와 생존에 대한 열망뿐. 이대로는 살 수 없다.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삶을 구도하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헤르만 헤세의 책을 허겁지겁 펼쳤다. 더 이상 늦지 않게, 질식할 것 같은 자유가 넘실거리는 검푸른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속에서 나는 데미안을 다시 만났다. 아니 데미안이 나를 불렀지 싶다.
불교에는 '전등식'이라는 행사가 있다. 도반들이 등불에서 등불로 불심을 전해 받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부처는 '오로지 자신만을 등불로 삼아 나아가라.'라는 말을 남겼다. 일단 등이 켜지면 그 등을 손에 쥐고, 운명을 향해 길을 밝혀 나아가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는 가르침이다. 데미안이 말한 카인의 표식도 앞서 말한 ‘전하여 받은 등불’과 다르지 않다. 데미안, 그는 이름만 달리할 뿐 실재한다.
알고도 나아가지 못하면 영원히 앉은뱅이로 살아야 한다. 나는 발렌타인을 만나 깨어난 내 운명을 깨닫고도,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했다. 싱클레어가 그랬듯, 자유를 향한 투쟁을 위해 감내해야 할 미래가 너무나 외롭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전하여 받은 등불’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고자 한다. 스스로 이마에 표식을 새긴 그 시점부터 사실 돌이킬 수 없었다. 우리 인간은 과거에 살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 미워한다. 그래서 가끔 당연한 일을 잊고 산다. 바로 사랑하든 미워하든 두 발로 걸어 앞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중요한 것은 내 몸, 내 두 발이다.
그러니까 부디, 너무 오랜 시간을 자신의 운명을 원망만 하느라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기를.
세상에 모든 카인의 후예들이여, 등불을 전해 받은 자여,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냥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는 단 한 번을 산다.
움직이는 화랑 <비껴서기> 운영 |
코스미안뉴스 인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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