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즈음 깊은 잠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삐비 삑-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꽉 들어차 있는 원룸에 팟- 하고 불빛이 켜지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술에 막 담가진 뱀처럼 비틀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그가 내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 야밤에 집에 올 거란 걸 생각도 못했던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화남과 당황이 얼룩져 감춰지지 않은 나의 눈빛에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서 왔어"
10초 뒤 내가 팔을 벌리자, 그는 슈트케이스에 커다란 몸을 구겨 넣듯이 나의 작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정적이 흐르자 나는 졸음이 몰려왔다.
"화났어?"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조심스럽게 술기운을 감추며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침대 옆자리를 팡팡- 손으로 두어 번 쳤다. 그 행동은 나 화나지 않았어, 내 옆으로 와-라는 말을 담고 있었다.
박선우를 처음 알게 된 건 막 겨울로 접어들기 전 가을비가 가끔 내리는 그럼 시점에 핸드폰 속에서였다. 나는 내 SNS 계정에 주은과 같이 방문했던 곱창 집 동영상을 올렸다. 자글자글 지글지글 소리가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 꼭 다시 곱창을 먹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10분 뒤 18개의 하트와 1개의 댓글이 달렸다.
[여기 맛있죠?]
달려있는 댓글에 네, 여기 제가 자주 가는 단골 집이에요. 아는 곳인가 봐요?라는 답글을 달았다. 흔히 먹는 곱창 사진에 여기가 어딘지 알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난 그저 댓글과 좋아요에만 집중을 했기 때문에 그걸 그가 알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SNS 메시지인 다이렉트로 연락이 왔다.
[거기 신도림역 근처 야곱집이잖아요. 아, 보니까 또 먹고 싶다.]
[야곱집이요?]
그 곱창집이 신도림에 있는 건 맞지만 내가 알기론 그 곱창집 이름은 털보 곱창이었다. '이 남자가 그냥 아는 척하는 거였어. 역시'라고 생각하며 이젠 메시지가 와도 답장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곱창 대화를 이 남자와 더 해서 뭐하겠는가.
[야채곱창이요ㅋㅋㅋ 줄여서 '야곱']
그런데 답장 온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는 미친년처럼 바닥을 굴러다니며 웃었다. 어이없이 웃기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퇴근 후에 화장이 다 지워진 채로 쌩얼이 되어버린 얼굴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피곤하고 지친 하루에 오늘도 간신히 일을 마치고 무거운 몸을 끌고 걷고 있었다.
줘도 입지 않을 것 같은 유행 지난 노란빛 카라 티셔츠에 촌스런 청바지 그리고 회색 운동화. 좀 많이 모자라 보이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부스스한 갈색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아줌마처럼 보이지만 아줌마는 아닌 것 같은 언니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길을 물어보는 것이라 생각해 한껏 크게 듣고 있던 이어폰을 양쪽 귀에서 빼며 그 여자를 쳐다봤다. '네?'라고 물음표를 붙이며. 그러자 그 여자가 입을 뗐다.
"복이 참 많아 보이시네요, 혹시 야곱이라고 아세요?"
난 왜 그때 그 야곱이 아닌, 그 야곱을 생각했을까. 갑자기 웃음이 일었다. 원래 같으면 확 무시하고 지나가버렸을 사람인데 작게 '몰라요. 죄송해요. 급해서'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나는 그에게 연락처를 물어보았고 내 연락처를 남겼다. 우리 야곱이나 먹을래요?라고. 그렇게 우습게도 야곱 덕에 만남을 시작했다.
우리는 선홍색 핏기가 도는 곱창을 바라봤다. 그 곱창의 모습이 익기 전까지는 다소 그로테스크하나, 다 익고 난 뒤 입으로 들어오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노릇노릇함과 가득 차있는 곱과 야채. 구수하고 부드러운 곱이 야채를 감싸 안고 촉촉함을 머금은 채 들어오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모든 것들이 한대 섞이며 오케스트라 연주를 했다. 그렇게 26년 동안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던 우리가 하나가 된 것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발갛던 내가 파랗던 네가 보랏빛으로 그렇게 섞여 물들어갔다.
*
수요일.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방은 습했고 밖은 무척 더웠다. 출근 전부터 짜증이 밀려왔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워 세수를 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옆에서 이불을 움켜쥐며 아직도 자고 있는 주은이 부러웠다. 억지로 몸을 깨워 밖으로 나오니 공기 중에 물방울이 가득해 손으로 건들면 다 젖어버릴 것 같은 날씨가 온몸을 감쌌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에어컨을 틀었다. 시원한 바람이 나오며 습하고 답답했던 공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유하 씨, 내가 이건 이렇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어요?"
한번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고 싶은걸 꾹 참으며 삼켰다. 송곳 대리님은 어떤 문서든 맑은 고딕체로 글씨 크기는 10포인트, 줄 간격은 160%로 하길 원했고 겉표지가 깔끔하며 제목 안에 내용이 모조리 들어 있어야 하는 보고서를 원했다. 꺼끌한 사포 같은 목소리로 나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와 다시 하겠습니다를 반복했다. 그러면 송곳 대리님은 더 뾰족해진 어투로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욧, 했다. 나무아미타불. 다 모든 일은 지나가리라. 난 그 악덕업주 같은 충고들을 껌처럼 징걸징걸 씹으며 한 귀로 흘려버렸다.
자리에 돌아온 나는 보고서를 수정하기 위해 다시 파일을 켰다. 그때 때마침 PC카톡이 울렸다. [오늘 진짜 덥다] 나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기범아 흐어어나미ㅓㄹㅏ언ㄴ] 우는 소리는 냈다. 그러자 기범이 왜? 또 송곳이 널 찔렀어?라고 되물었다. 나는 또 거기에 응이란 대답을 하지 않고 [으갸갸갸갸ㅐ갸ㅐ 짜증 나], 했다.
[맛있는 거 사줄까?] 기범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내가 기분이 풀리는지, 왜 내가 슬픈지, 왜 내가 아픈지 알고 있다.
*
그는 내 얼굴엔 내 행동엔 모든 게 적혀있다고 했다. 나는 입술을 앙 다물며 그럼 뭐야 나 너무 쉬운 여자잖아-라고 한다. 그러면 언제나 그는 웃으며 요리로 다져진 커다랗고 투박한 손을 내 머리에 얹곤 그래서 좋아-라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