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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백수 방쿤 Apr 07. 2019

어줍잖은 위로를 거부한다

감정적 통각을 마비시키는 마약을 끊고, 환부를 직접 봐야 하는 이유

-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난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았다. 제목이 괘씸하니 읽어봐야 욕을 한 바가지 할 듯 싶어서가 첫 번째 이유요, 두 번째 이유는 그렇게 괘씸한 제목을 가진 책을 너나 할것 없이 읽어대는 풍조를 거스르고 싶었음이요, 마지막 이유는 그 책을 계기로 이른바 '힐링'이 판을 치는 두려운 사회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줍잖게 위로 받는 것을 거부한다. 사실, 그저 위로만으로 해결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위로를 할 바에는 샤니 크림빵을 사주길 바란다. 실론티까지 얹어서 주면 눈물 나게 따뜻한 겨울이 될 것 같다. 


- '워라밸' 이전에는 힐링의 시대였다. 누구나 힐링을 외쳤고, 책에 힐링이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불티나게 팔려 나갔으며 청춘이니 아픈것은 당연하다 생각하는 수 많은 젊음들이 힐링을 소비했다. 그야말로 들불처럼 번져나간 힐링의 문화가 흐른지도 꽤 되었다. 아직도 서점에는 주인공만 바뀐 마약같은 책들이 허다하다. 라이언이, 곰돌이 푸가, 보노보노가 과연 우리처럼 괴로울까? 설령 이런 책을 읽고 나아졌다면 얼마나 나아졌는지 묻고 싶다. 여러분의 아픈 곳이 시원하게 나았는지. 끙끙 앓던 것들이 눈 녹듯 사라졌는지 묻고 싶다. 만약 깨끗이 나았다면 어떤 책을 읽고 그렇게 말끔히 나았는지도 묻고 싶다. 진심으로 나는 묻고 싶다. 힐링은 잘 끝난 것인지. 그렇게 안녕들하신건지.


- 물리적 외상과 정신적 외상은 근본부터가 다르다. 전자는 앓고 나음이 명확하다. 아프면 앓는 것이고 그 아픔이 멎으면 낫는다. 다리가 부러지거나 충치가 생긴다거나 고름이 생기고 딱지가 앉는다 해도 앓고 나음이 명확하다. 그러나 정신적 외상은 다르다. 그 누구도 타인의 정신적 외상을 가늠할 수 없다. 심지어 본인도 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가 지레짐작할 뿐이다. 엑스레이나 CT를 찍어도 마음의 병은 진단할 수 없다. 그저 아프다니까 아픈줄 안다. 어딘가 답답하고 울적하고 풀리는 것도 없고, 돈도 없고. 비어가는 지갑 만큼 추워지는 겨울, 차가운 눈과 함께 침잠하는 청춘들은 아프다. 힐링을 외쳐대며 강연과 독서에 여가 시간을 바쳤지만 여전히 아프다. 우리들의 아픔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들의 아픔은 어떻게 나을 수 있는가.


- 잠시 물리적 외상의 치료 과정을 따져보자. 어딘가 아프면 병원에 간다. 그래, 가슴이 아프다고 치자. 가슴이 아파서 흉부외과를 갔더니, 엑스레이를 찍으란다. 엑스레이를 찍으니 폐에 구멍이 나서 공기와 피가 새고 있으니 응급 처치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온다. 옆구리를 째서는 관을 박고 며칠의 경과를 지켜본다. 이윽고 피와 공기가 모두 제거되고 다시 호흡이 원활해진다. 관을 뽑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일련의 치료 과정이다. 어딘가 아픈 것을 낫게끔 하는, 힐링은 '어디가 아픈지 똑바로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 이는 곧 마음의 병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정신과 영혼의 힐링을 외치는 이들은 실상 영혼의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니, 실상 자신이 정말 아픈지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나라 멘탈 힐링의 현 주소다. 즉, 단순한 일상적 우울함과 스쳐가는 괴로움 조차도 청춘의 아픔이라고 생각하며 심각하게 받아 들이니 그 자체가 더욱 더 마음의 병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의 제목을 괘씸하게 생각한다. 제목에서부터 우리 청춘을 '아픈 것이 당연한 존재들'로 매도하고 있다. 백 번 양보해서 다양한 감정의 충돌과 현 상황에 대한 몇몇 좌절의 조각들로 인해 아픔이 찾아온다고 쳐도 그것은 청춘이기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다. 우리의 청춘이 끝나고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과연 우리들의 아픔은 사라져 있을까.


- 그렇기에 나는 위로 받기를 거부한다. 맹목적인 위로와 힐링은 우리들 스스로의 환부를 찾는 것 조차 망각하게 만들고 잠깐의 위안을 통해 일상에 사로잡힌 채 괜찮다고 최면을 거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러한 모든 과정을 거부한다. 다만 나의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가 그 본질을 항상 캐묻는다. 내가 우울하다면 어째서 우울한지,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우울한지 반드시 찾아낸다. 찾아 낸 후에는 그러한 '심적 환부'를 도려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힐링이라는 이름의 위약(僞藥)이 아니다. 스스로의 마음은 스스로가 의사가 되어 들여다 보는 수 밖에 없다. 펜이 칼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심적 환부를 도려내는 메스가 되기를 바란다. 


- 부디 우리들에 대한 위로를 중단하기 바란다. 우리들에 대한 힐링을 중단하기 바란다. 우리들의 아픔이 설령 당연하다 해도 좋다. 그러한 당연함 조차 깨부술 수 있는 만큼의 자아 탐색이 필요한 시기다. 더 이상 우리들의 아픔을 당연하다고 인식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바란다. 바라는 것이 참 많은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 볼 시간과 여유를 갖기를 바란다. 주말의 하루를 시간 내어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음악 하나 걸어 놓고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길 바란다. 우리들이 아프다면, 그러한 아픔이 당연하다면 이제는 아픔 조차 스스로 깨부술 때다. 


-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다. 이기적일지 몰라도, 지금까지의 아픔에서는 벗어나고 싶다. 설령 다른 아픔이 찾아 오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치유할 수 있는 스스로의 '감정적 자가 면역 체계'를 갖추고 싶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를 변화 시켜, 카멜레온 처럼 환경적 감정 변화에 맞춰 내 스스로를 빠르게 진단하고 감정적 환부를 도려낼 수 있을 만큼으로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힐링이라는 마약을 끊고, 아픔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니 부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중단하길 바란다. 우리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위로는 멈춰주길 바란다. 나는 거부한다. 하잘것 없는 빈 껍데기 뿐인 위로를. 


・2013년에 개인 블로그에 발행했던 글을 다시금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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