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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인분공부 Jun 12. 2020


편집자의 기쁨과 슬픔

출판편집자로 20년을 살았다. 세상의 트렌드를 앞서 예측하는 문화기획자로서 독창적인 콘텐츠를 지닌 저자들과 협업하며 보낸 흥미진진한 나날들이었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야근과 스트레스에 절어 살았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은 적도 많았다.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 상당수는 이미 업계를 떠났다. 지난 20년간 이 일을 하며 나는 어떤 기쁨과 슬픔을 느꼈을까?     


책을 만들 때는 저자나 번역가, 디자이너, 외주 편집자, 담당 마케터 등이 일종의 팀처럼 일하며 편집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조율한다. 단행본 편집자는 한두 달마다 또는 서너 달마다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물리적인 실체로 만난다. 자신이 한 일을 객관적인 실체로 마주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그대로 접한다. 그 책이 관계자들의 호평을 받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편집자는 물론 함께 팀을 이루어 일한 모든 사람들이 큰 기쁨을 느낀다.      



나는 출판사에 취업하기 전 다른 일을 했었고, 출판사 중에서도 일반 단행본 출판사와는 조직 규모나 문화 면에서 차이가 큰 500인 규모의 교육기업에서도 5년간 일한 적이 있다. 그래서 출판사와 일반 기업이 얼마나 다른지 체험해왔다. 경력이 많지 않은 실무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성과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개인별 성과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직업에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하던 나는 곧 사내정치의 덫에 걸렸다. 어느 순간 내가 기획한 책을 실무자가 편집해서 베스트셀러가 됐는데도 그 책을 기획한 사람이 나라는 걸 사내에서 아무도 거론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공들여 성사시킨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에 상사였던 임원이 담당자처럼 일일이 관여하고 나서는 바람에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밀려나고 보조 역할만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모든 공은 상사와 실무자들의 몫이었고, 모든 문제는 중간 관리자인 내 탓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회사에서는 권력이 있는 자가 남의 공을 빼앗고 권력이 없는 자는 자신의 공을 인정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상사와 부하직원의 중간에 있었기에 양쪽에서 이용당했던 나는 결국 회사에 팀장 직위 해제를 요청했다. 다시 실무자가 된다면 아무도 내 실적을 빼앗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무자가 된 이듬해 나는 7종의 책을 기획하고 출간해서 1종은 종합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3종은 분야 베스트셀러 상위에 랭크되었다. 무엇보다도 7종의 책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그러고 나서 나는 사표를 냈다. 처음부터 “박수칠 때 떠나”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것이 내 목표였기 때문이다. 좋은 회사가 되려면 효과적인 협업을 통해 장기적인 수익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 전략 없이 직원들의 단기 매출 실적을 서로 비교하며 압박하는 것 이외에 아무 대안이 없는 조직은 미래가 밝지 않다. 내가 그만둔 후 1년 이내에 그 편집팀에서 여러 명이 그만두었다. 아마도 가장 실적이 좋았던 내가 나간 후 다른 직원들에 대한 압박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원래 해야 할 경영 활동에는 소홀하고 각 편집팀장의 역할과 권한을 빼앗아 대신 행사하는 데만 급급했던 임원이 재직하는 동안, 나뿐만 아니라 다른 편집팀장들도 회사를 그만두었다. 해외 각국에 수출하는 막강한 콘텐츠를 지닌 한 팀의 편집팀장만 건재했는데, 그 팀장이 공공연히 그 임원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결국 그 임원 역시 내가 퇴사하고 1년 후 회사를 그만두었다.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함께 만들어 낸 생산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 곧 사회의 ‘이유’이다. 생산과 분배는 사회관계의 실체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관계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고독의 문제는 바로 생산과 분배의 소외문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만들어 내고 나누는 과정의 무엇이 사람들을 소외시키는가?”라고 썼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여럿이 지속적으로 협력해서 성취하기 위해 회사를 세운다. 그런데 힘을 합쳐 일을 하고 그 결실을 나누는 과정에서 권력이 작용하여 분배를 왜곡하고 누군가를 희생시킨다. 한 회사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분배가 왜곡되어 누군가는 무임승차하고 누군가는 이용당한다.      


결국 편집자라는 직업도 다른 많은 회사원들과 비슷한 문제에 부딪힌다. 일 자체는 보람 있지만, 전문성과 기여도를 정당하게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편집자의 전문성을 쌓으려면 한도 끝도 없지만, 전문성은 10년 경력 정도까지만 제대로 대우받고 그 이상이 되면 협소한 조직에서 상사나 경영자의 전문성을 능가하게 되기에 오히려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      


돌아보면 나뿐만 아니라 내 상사였던 편집장이나 주간은 모두 경영자와 잘 맞지 않아 수년 이내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편집 실무자와 편집장과 경영자가 고유의 역할을 하면서 공존할 방법은 없을까? 아주 드물게 그것을 성취하는 츨판사가 있다면 다른 회사들을 훨씬 앞선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들은 대개 자신의 일을 좋아하며 주로 인간관계, 회사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직업인으로서 편집자의 정체성은 그 일을 하면서 맺게 되는 온갖 인간관계와, 그 일을 하기 위해 소속된 조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편집자가 출판사에서 일하며 더 높은 성과를 올리고 더 행복해지는 방법은 무엇일지 지난 20년간 고민한 내용을 이 연재 시리즈에 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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