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안전선
세상에는 의인도 많다.
불의나 위험을 보면 먼저 자신의 안전을 돌보기 마련인데 이들은 다르다.
자신의 빠질 위험이나 겪을지도 모르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행동한다.
자신한테 아무런 득도 없는 일을 하다가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세상은 이들을 의인이라 부르며 칭송한다.
자기와 상관없는 남의 일에 배 놔라 감 놔라 끼어드는 오지라퍼들도 있다.
의인과 오지라퍼의 경계는?
오지라퍼란 말은 신조어이다.
'오지랖을 습관처럼 부리는 사람'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코미디 프로에 나오는데 남자와 여자 한 명씩 두 명의 오지라퍼가 나온다.
이들은 연인의 사소한 다툼에 끼어들어 온갖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처음에 등장하는 젊은 연인은 곧 주변으로 물러나 구경꾼이 되고 만다.
무대를 차지한 오지라퍼들은 날 선 신경전을 벌인다.
화려한 입담으로 상대를 몰아세우며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배꼽을 잡는다.
여자는 주로 남자들의 허세나 거짓말 같은 부분을 공격하고 남자는 여자들의 변덕이나 이중성을 꼬집는다.
이 과정에서 SNS나 포털사이트에서 화제가 된 내용들이 소개되는데 외모지상주의나 물질만능주의가 곳곳에 배어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지만 관객들과 나름 소통을 하며 재치 있게 웃음을 터뜨린다.
처음에 언급했던 의인과 오지라퍼의 차이는 무엇일까?
의인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지는 않는다.
돕는 역할에 충실할 뿐이고 처리가 되면 그냥 자기 길을 갈 뿐이다.
그런데 오지랖은 자기가 깃발을 휘두른다.
자기 중심성과 지배성이 드러난다.
결국 타인을 진정으로 존중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의로운 행위와 오지랖이 갈린다고 볼 수 있다.
오지랖은 사람을 귀찮게 한다.
아주 심각한 문제이면서도 잘 깨닫지 못하는 오지랖 가운데 '부모의 눈먼 사랑'이 있다.
아이들은 발달 수준에 맞는 발달과제를 수행하면서 성장한다.
그런데 오지랖이 심해서 아이가 스스로 겪어야 할 일들을 나서서 해주는 부모가 있다.
숙제나 공부뿐 아니라 친구를 사귀는 영역까지 일일이 간섭을 하고 주도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
상대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오지랖의 심각한 폐해라고 하겠다.
자주성이 강한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한테 오지랖을 부리면 거리낌을 느낀다.
오지랖이 강한 부모와 자주성이 강한 아이가 만나면 충돌이 생긴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기의 관심과 애정을 거부하는 아이한테 서운함을 가지고 아이는 아이대로 자신을 옥죄어 오는 부모한테 답답함을 느낀다.
그야말로 눈먼 사랑이 낳는 비극이다.
그런데 의존성이 강한 아이라면 어떨까?
오지랖이 강한 부모와 의존성이 강한 아이는 궁합이 잘 맞을까?
아이가 어릴 때는 부모가 만족과 보람을 느낄 수도 있다.
부모가 해주어야 할 것이 실제로 많이 있기 때문에 해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는 아이가 사랑스럽고 자신이 아이한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느낌에 뿌듯한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스스로 해야 할 일에도 부모한테 손을 벌린다면 어떻겠는가.
의존성이 강한 아이들은 오지랖 강한 부모한테 적응이 되면서 무엇이든 스스로 할 줄 모르게 된다.
결국 아이가 성인이 되어도 마음은 어린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에 계속 보살펴야 한다.
여러 종류의 사회문제를 들여다보면 적절한 경계를 넘어서는 오지랖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지랖을 부리게 되는 것이 그 사람의 습성일 수도 있겠지만 근본을 보자면 오지랖은 착각에서 비롯된다.
상대가 해야 할 영역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
상대의 능력과 자신의 능력을 잘못 판단하는 경우.
상대의 의도를 오해하는 경우.
이런 경우들에 오지랖이 발동할 수 있다.
나의 영역과 상대의 영역을 제대로 파악하려 해야 한다.
함부로 선을 넘으면 말썽이 생긴다.
나도 모르게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지 조심해야 한다.
또한 상대의 오지랖을 적절히 제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필요한 도움을 적절하게 주고받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책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