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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기연 May 13. 2019

'중'은 반말이고 '스님'은 존댓말?

청정 승가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귀의승(歸依僧) 중중존(衆中尊)"

"나무승"

다 같은 말이다.

중(衆)과 스님(僧)은 같은 뜻이다.



스님이란 말을 존댓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부터 존댓말은 아니었다.

집단을 뜻하는 '상가'라는 말이 변형된 것일 뿐이다.


중이란 말을 막말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쓰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막말이 아니다.

집단을 뜻하는 '상가'라는 말을 번역한 것일 뿐이다.


불교에는 목숨보다 더 귀한 세 가지 보물이 있다.

깨달은 존재이며 삶의 지향점이 되는 부처님.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인 법.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룩한 집단인 승가.

이 세 가지 보물에 의지하는 것을 '삼귀의'라고 한다.


귀의불 양족존 : 두 가지를 구족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귀의법 이욕존 : 욕구를 여의는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귀의승 중중존 : 가르침을 따르는 거룩한 집단에 귀의합니다.

불자라면 삼귀의를 핵심 가지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조계종이 시끄럽다.

조계종이라는 종단은 마치 재벌처럼 군림해왔다.

굳이 나누어보자면 조계종이란 종단도 승가 가운데 하나이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더구나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는 집단이 말이다.


부처님을 따르는 집단을 '상가(Sangha)'라 불렀다.

상가는 집단이란 뜻을 가진 말이므로 '거룩한 집단'이라 이해하면 되겠다.

그런데 이 말이 한자로 번역될 때 음을 빌어서 '승가(僧伽)'가 되었다.

여기에서 승이란 말이 변형되어 스님이 된다.

한편으로 뜻을 번역해서 중(衆)이 되고, 이것이 그냥 중으로 쓰였다.

그러니까 '중'과 '스님'은 같은 말이다.


스님이 거룩한 것은 '불'과 '법' 때문이다.

그들이 부처님의 법을 실천할 때 거룩해지는 것이다.

스님은 신분이 아니다.

그의 행위에 따라 거룩하기도 하고 비루하기도 하다.

일반 대중이 믿고 따라야 할 존재는 '그냥 스님'이 아니라 '거룩한 스님'이다.


거룩한 스님은 '청정하고 화합하는 집단'이다.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려는 순수한 의지를 가져야 청정하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비방하거나 다투지 않고 어울려 살아가야 화합한다고 할 수 있다.

청정하지 않거나 화합하지 않는 집단을 의지하면 안 된다.



청정하지 않은 집단을 의지하면 정신이 어지러워진다.

화합하지 않는 집단을 따르면 갈등에 휘말린다.

청정함을 따르면 삶의 방향이 뚜렷해진다.

화합을 따르면 덕이 쌓인다.

청정하고 화합해야 복의 밭(福田)이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밭이라야 행복이란 수확을 거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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