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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기연 Jul 07. 2019

양비론의 폭력성

부정 사고

"이것도 저것도 다 글러먹었어."

양쪽을 다 부정하는 양비론이다.

양비론은 부정 에너지에서 나온다.

부정 에너지는 폭력과 친하다.



눈빛이 싸늘하다.

입꼬리는 묘하게 일그러진다.

코웃음을 친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한다.

"다 소용없어."


매사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뭣하러 일을 열심히 하냐고 한다.

쉰다고 해서 좋을 게 뭐냐고도 한다.

이래도 탈이고 저래도 탈이다.


호기심과 의욕을 가진 사람을 '순진한 어린놈'이라 한다.

그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우울한 잿빛이다.

일이 잘 되어도 '그게 뭐 대수라고' 하면서 깎아내린다.

일이 잘못되면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차갑게 비웃으며 부정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괴로운데 괴로움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그렇다.

양비론은 비겁한 자의 치사한 변명일 뿐이다.

그의 속은 썩어 있다.


상대를 깎아내리면 자신이 상대적으로 더 나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착각이 굳어버리면 무엇이든 부정하고 본다.

놀랍게도 부정 에너지가 안전하게 느껴진다.

늘 최악의 상황에 마음을 맞추니 더 나빠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잘못될까 봐 두려운 마음을 원천 봉쇄하느라 양비론에 빠지는 것이다.


기대를 하다가 틀어지면 실망감이 크다.

잘하려고 애쓰다가 실패하면 쓰라린 좌절을 마주해야 한다.

실패의 쓰라림을 피하려고 애초에 기대도 안 하고 시도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공하는 자들이 부럽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못난 마음이다.

'부럽지 않아. 부러우면 지는 거야.'를 되새기며 부러움을 감춘다.

양비론을 내세우면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다.


현실의 모순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다.

모순을 해결하려는 대안에는 희망을 가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 대안마저 부정하는 것은 희망의 싹을 밟아 버리는 폭력이다.

양비론은 폭력일 뿐이다.


일부를 보고 전부를 싸잡아 욕하는 것도 어리석은 폭력이다.

현실 정치에 회의를 품게 만드는 쓰레기 언론의 폐해는 심각하다.

잘못된 것을 밝혀내고 고치려 하는 비판은 필요하다.

하지만 양비론은 그냥 폭력일 뿐이다.



혹시 심한 회의가 드는가?

매사가 싫고 귀찮은가?

그렇다면 양비론에 빠지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부정 사고는 대안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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