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산, 겨울숲에서 봄을 마중하다 — 올괴불나무 꽃 앞

올괴불나무_27회

by 광풍제월

수리산, 겨울숲에서 봄을 마중하다 — 올괴불나무 꽃 앞에서

2026.3.21. (D-285)


오늘은 수리산에서 ‘겨울숲 다시보기’ 답사가 있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겨울숲 바라보기가 끝난 뒤 이어지는 짧은 프로그램이지만, 계절이 넘어가는 길목에서 다시 숲을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르다. 겨울의 끝을 배웅하고, 봄의 시작을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병목안시민공원에서 출발해 천주교 최경환 성지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 여러 번 걸었던 익숙한 코스였으나 오늘따라 공기가 달랐다. 온화하게 갠 날씨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 숲을 걷는 경험의 질을 한껏 높여주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축복 같은 하루였다.


조금 걷자 목련나무에 맺힌 꽃눈이 발길을 붙잡았다. 단단히 닫혀 있던 겨울눈이 서서히 풀리며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꽃눈 하나하나가 일제히 봄을 외치는 듯했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탄성을 터뜨렸다. 계절은 말없이 오지만, 그 변화를 알아채는 인간의 순간은 늘 소란스럽다.


오늘 답사는 새로운 수종을 익히는 공부가 아니었다. 그동안 겨울숲에서 지켜보아 온 나무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살피는 시간에 가까웠다. 같은 나무를 다른 계절에 다시 보는 일. 그 단순한 반복이야말로 숲을 이해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회양목이었다. 평소 무심히 지나치던 작은 꽃이었지만, 루페를 대고 들여다보니 전혀 다른 우주가 펼쳐졌다. 정중앙에 암꽃이 자리하고 그 주변을 호위하듯 수꽃이 둘러싼 구조. 작고 조용한 꽃임에도 그 안에는 단단한 질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의 열매 안에 세 개의 씨방이 깃든 모습은 마치 작은 생명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집처럼 보였다.


이어 만난 것은 올괴불나무였다. 잎보다 먼저 터뜨린 분홍빛 꽃망울이 시선을 단번에 낚아챘다. ‘숲속의 발레리나’라는 별칭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 가볍게 내려앉은 꽃잎은 숲의 공기마저 우아하게 바꾸어 놓았다. 괴불나무보다 앞서 피기에 ‘올’이라는 접두사가 붙었다는 설명보다, 내 마음에는 봄의 전령이라는 수식어가 먼저 닿았다.


내려오는 길, 바위가 움푹 파인 틈새에서 매화말발도리를 만났다. 숱하게 지나던 길이었건만 이제야 존재를 드러낸 녀석이 대견했다. 척박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버텨낸 시간의 무게가 꽃눈에 서려 있었다. 묵은가지에서 꽃을 틔우는 그 끈기 어린 방식은 생명이 조건을 탓하기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스스로 길을 만들어낸다는 진리를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비목나무. 도톰하게 오른 꽃눈이 양쪽으로 벌어지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가운데 잎눈을 두고 양옆으로 꽃눈이 피어나는 모양새가 마치 환희에 찬 두 팔을 들어 올린 듯했다. 본래 남부 지방 수종임에도 이곳 수리산에서 여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나중에 확인하니 이곳의 토양과 기후가 비목나무가 자라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걷는 사이, 생강나무 꽃도 막 노란 기운을 토해내고 있었다. 겨울의 무채색을 간직했던 숲이 조금씩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피어날 진달래의 꽃망울까지 그려보니, 봄은 이미 우리 곁에서 한창 진행 중이었다.


수리산(修理山). 마음을 닦고 이치를 깨닫는다는 그 이름의 유래처럼, 오늘 숲은 나에게 조용한 문장을 건네왔다. 겨울눈이 꽃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깨닫는다. 그들은 멈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봄은 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1774122217663.jpg 올괴불나무(수리산, 2026.3.21. 촬영 43기 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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