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사랑과 낭만에 관하여
낭만은 이루어졌을 때 증명되는 것 인가, 실패했을 때 증명되는 것 인가. 절대 답을 정할 수 없는 낭만파 N대 미제 중 하나이다. 그런데 뭐 이루어지면 어떻고 실패하면 어떤가. 그 과정들 하나하나가 낭만이라 말하고 싶다. 그래도 이왕이면 이루어져서 낭만을 증명하는 것이 좋은 그림이지 않을까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어린 시절 나는 낭만이 주는 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낭만도 실패만 있으면 낭만을 간직하기 무척 어렵다. 정말 가끔 한 번은 낭만의 주인공으로써 클리셰를 완성했을 때 그 짜릿함은 이로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교내에서 독서토론 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시를 수시전형으로 준비하고 있던 나에게는 교내 대회 수상경력이 꽤 중요한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뜻 참가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유는 일단 토론이라고 하는 것을 해본 경험이 전무하기도 했고 소심한 성격이라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2인 1조라는 사실. 선뜻 같이 나갈 친구를 구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이미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최적의 조합으로 2인 1조 팀을 구성하여 참가 신청을 하고 있었다. 그런 친구들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았어서 선뜻 누군가와 함께 참가하는 것에 대해 자신감이 떨어졌었다. 그런 와중 내 옆 짝꿍이었던 K군이 정말 의외의 제안을 내게 건넸다. 나와 함께 참가하자고 말이다. K군의 참가 제안은 정말 깜짝 놀랄만한 제안이었다. K군은 전교 5등 안에 들었던 정말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내가 아닌 더 공부를 잘하는 친구와 참가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단순히 짝꿍이고 서로 인디음악과 스포츠를 좋아하는 취향 잘 맞는 친한 친구였기에 제안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왜 나였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저 '좋아!' 한마디로 대답했을 뿐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하면 낭만이 아니지 않은가, 시작부터 나에게 태클이 들어왔다. 나와 가깝게 지냈던 공부를 잘했던 P라는 친구가 나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의 참가에 대해 핀잔을 주었다. 장난일 거라 여겨 넘어가려 했었지만 정말 그날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뭐 하러 나가냐, 너보다 공부 잘하는 애들 차고 넘치고 너와 같이 참가하는 K군이 아깝다. 포기해'. 정작 본인은 참가조차 하지 않으며 나에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저렇게 얘기했다. 얼마나 저 말이 상처였으면 장장 1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 이런 공격이 있었기에 더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아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당시에 나는 엄청나게 화가 났었다. 처음으로 친구에게 화를 냈었다. 성적순으로 상 나오는 거 아니니까 지켜보라고. 친구한테 딱히 욕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결과로 보여주겠다고만 말했다. 자신감이 있어서 저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에는 참가에 의의를 두고 있어 수상은 꿈에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저 상황에서는 저 대답 말곤 반박할 게 없었다. P군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철저히 언더독이었다.
토론대회에 대해 추가적인 설명을 곁들이자면 박민규 작가님의 장편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관련된 주제 5개 중 하나를 선택하여 찬반 견해를 골라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책의 간략한 주제는 프로야구 최약체 팀인 삼미슈퍼스타즈와 주인공의 서사를 통해 1990년대~2000년대 초반 한국 격동기 시절 개인 군상의 실패에 대한 발자취와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선정된 주제들 또한 그러한 내용을 주로 담았다. 시간이 지난 이야기라 당시에 주제들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부분 주제들이 1990년대 시대 상에 대한 변혁과 관련된 내용들이 주된 주제였던 것만은 기억한다. 다른 팀들은 대부분 책의 핵심 주제와 관련된 토론 주제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모두가 선택하는 주요 주제를 선택하고자 하니 나와 K군은 망설였었다. 청소년 추천 도서이긴 하나 당시에 실패가 와닿지는 않는 시절이었다. 개인적으로 책의 핵심 주제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K군도 어렴풋이 동의하는 눈치였다. 남들이 많이 선택하는 주제를 우리도 같이 따라 선택한다면 경쟁이 안 되는 것은 둘 째치고 우리의 견해를 남들에게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준비를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주제 선정부터 애를 먹던 중 맨 마지막 주제인 '지역 연고주의'가 눈에 띄었다. 단어부터 생소했다. 사전적 의미는 지역에 따라 이해관계와 관심을 함께하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배타적인 태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당 주제의 출제 의도는 지역연고에 따른 정치적 대립과 지역 패배주의 사상에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기 위해 출제된 것이라 했다. 당연하게도(?) 책을 읽었지만 해당 주제가 정치와 지역 패배주의에 관련된 사안이라는 것을 나와 K군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지역 연고주의'라는 단어가 한창 박지성 선수의 영향을 받아 해외축구에 미쳐있던 시절이라 그런지 '더비 라이벌'이라는 단어로 오해(?)하게 되었다. 더비 라이벌, 지역을 중심으로 라이벌 매치를 뜻하는 단어이다. 나에게 '지역 연고주의'는 지역 중심으로 다른 지역을 배척하는 그런 부정적인 의미로 인지한 것이 아닌 지역을 중심으로 소속감을 형성하여 스포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역 간의 건강하고 정당한 경쟁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겼다. K군에게 지역 연고주의를 스포츠적 관점에서 풀어내보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실제 책도 야구를 소재로 풀어낸 책이니까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나와 같이 축구와 야구에 미쳐있던 K군은 당연히 내 의견에 동의했다.
토론대회에서 우리의 순서는 거의 마지막 즈음 인걸로 기억한다. 앞선 팀들은 비슷한 주제로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끊임없이 발표와 질의응답을 주고받았기에 전체적인 회장 내 분위기가 지쳐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순서가 되어 그동안 그 어떤 팀도 선정하지 않은 '지역 연고주의'라는 주제로 토론을 시작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생소한 주제였기에 순간 이목을 끌게 되었다. 당연하다시피 '지역 연고주의'는 주제를 선정하기에는 주제 맥락을 찾기 어려웠기에 그 어떤 팀도 선정하지 않은 주제였다. 하지만 우리의 방식대로 내용을 해석해서 발표했다. '지역 연고주의'라는 부정적 단어임에도 '지역 연고주의'를 찬성한다는 정답과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당시 참관하고 있던 선생님들의 표정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걸 지금도 기억한다. 모두의 귀추가 주목된 상황, 우리는 천천히 근거를 내세워 '지역 연고주의'를 찬성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가 주목한 '지역 연고주의'는 스포츠적 관점에 대한 '지역 연고주의' 였다는 주제를 시작으로 해외축구에서 유명한 '맨체스터 더비' 등의 라이벌 매치를 포함, 국내 야구에서도 유명한 지역 라이벌 매치 등 각종 지역 관련 경쟁 콘텐츠를 예시로 소개했다. 그리고 이러한 거대 스포츠 구단들이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예시들을 소개하며 이러한 지역 경쟁 활성화는 각 스포츠 구단의 마케팅 활성화 및 수익 상승, 팬들의 소속감 고취 등 다양한 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소개했다. 실제 책의 주 소재였던 '삼미슈퍼스타즈' 팀도 지역 연고를 통해 팬들의 사랑을 받고 흥망성쇠를 겪어나간 것이라 주장했다. 스포츠적 관점에서 '지역 연고주의'는 스포츠 마케팅 및 콘텐츠로서의 자리매김한 것도 중요하지만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팬들의 지지와 사랑도 지역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땔레야 땔 수 없는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했다. 가장 이성적인 주제에서 가장 감성적인 의견을 내세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회장 내 분위기는 모두가 예상 못한 주제에 가장 예상 못할 답변에 공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긴 시간의 토론대회에 지쳐 눈이 반쯤 감기고 있을 때 우리의 흥미로운 주제와 발표는 회장 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선생님들의 묘한 표정을 보고 처음으로 우리의 작전이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마지막으로 질의응답 시간 때 우리를 제외하고 1학년 팀에서 가장 잘했던 팀(실제로 준우승했었다) 이 지역 연고주의에 대한 정치적 측면으로서의 부정적 견해를 내세웠다. 아마 이 팀은 이 주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공격을 한 것이겠지만 정작 주제를 잘못 파악했던 우리에게는 아이러니하게 아무런 견제도 되지 못했다. 딱 한 마디 던졌다. '우리는 지역 연고주의를 스포츠적 관점에서 주제를 얘기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관점에서의 지역 연고주의에 대해 답변드릴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반론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정말 아무도 그리고 나 조차도 기대하지 않던 대회 대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언더독의 반란 이었다.
시간이 지나 P군이 찾아와 먼저 사과를 했었다. 정말 대상을 차지할 거라 생각도 못했으며 너의 가능성을 평가절하한 점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이다. 당연히 괜찮다고 말하고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픽션 1%도 포함하지 않고 이렇게 인생의 몇 없을 주인공 서사를 조금 이른 나이에 경험하게 되었다. 정말 말 그대로 '주인공 클리셰'였다. 아쉽게도 주인공 클리셰를 경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끔 나의 세상 밖에서 스스로가 주인공임을 증명하는 멋진 사람들이 있지만 적어도 내가 주인공이 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 클리셰를 증명함으로써 나의 낭만을 실현한 이 경험은 내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성취의 경험이다. 그저 내가 이런 경험을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꼭 경쟁을 해서 엄청난 업적을 이루고 지위를 얻고 성공을 이루어 내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겨우 교내에서 열린 토론대회일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아주 사소한 것이어도 좋으니까 성취하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주인공 클리셰를 증명함으로써 낭만에 물들어 가는 삶을 살아갔으면 하고 말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성취의 경험이 그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낭만의 원동력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나처럼. 어린 시절 값진 경험이 실패를 마주해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양분이 되었다. 물론 대상을 수상한 것도 업적이지만 만약 내가 대상이 아니었어도 오랫동안 기억했을 것이다. 실패도 성취도 전부 주인공이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주인공 클리셰를 증명했을 것이라 믿는다. 나를 믿는 것만이 주인공 클리셰를 증명할 유일한 징표이기 때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