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사랑과 낭만에 관하여
90년대생 세대들은 수많은 만화영화 범람의 시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에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각 세대만의 공통분모가 하나쯤 있겠지만 90년대생 세대의 대표 공통분모 아이콘은 어린 시절로만 한정 지으면 단연코 만화영화라 자부할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 보았던 그런 만화영화들에 대해 상당히 고평가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 시절 만화영화들은 90년대생 어린이들에게 각자의 방식대로 큰 울림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정, 동료애, 사랑, 희망, 선, 정의 등 순수한 감정과 가치들을 배우기에 너무나 좋은 교육 자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항상 만화 속 주인공을 상상하며 닮아가려 노력했다. '나는 만화 속 주인공이야'라고 매번 되뇌였다. 만화 속 주인공들이 멋있고 근사했으며 누구나 좋아하는 착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점점 나이를 먹고 커가게 되면서부터 만화영화는 자극적인 것, 유치한 것 등으로 분류되며 배척하는 기류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만화가 담은 고결한 주제를 우선하기보다 재미 위주로 평가하려는 그런 흐름 속에 나만큼은 일종의 저항 정신으로 만화영화만의 순결한 가치를 지켜내고 싶었다. 물론 어린 시절을 지나 본격적인 학업의 시절인 중, 고등학교 때부턴 보는 만화영화에서 읽는 만화로 옮겨 가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도 친구들에게 만화를 추천할 때는 열심히 그 만화의 주제와 가치를 소개하곤 했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무렵, 사춘기의 절정이었던 시절에 나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새로운 환경에서 본격적인 입시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 두려웠고 밤늦게 까지 야자를 하며 자유를 억압당하고 내가 좋아하는 게임과 만화도 보지 못하는 그런 모든 상황에 대해 두려웠다. 그런 불안전한 시기에 접한 것이 읽는 만화, 바로 '웹툰'이었다. 네이버 웹툰 초창기 시절에 유입된 나는 정말 과장 조금 보태서 거의 모든 작품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봤었다. 그나마 바쁜 학창 시절에 틈틈이 볼 수 있는 것이 웹툰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소년성장물 만화만 보던 내가 더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만화를 접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일상의 소재들이 나의 삶에 투영되어 더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더욱 웹툰에 광적으로 몰두하게 된 것도 있다.
하일권 작가님의 '안나라수마나라'는 두렵고 불안했던 학창 시절의 나의 커다란 버팀목이 되었다. 지금 봐도 작화나 연출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이니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작품이기도 하다. 나의 버팀목이 되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작중 주인공인 '윤아이' 때문이었다. 나도 입시 경쟁, '윤아이'도 입시경쟁. 차이점은 난 가난하지 않았다는 것, 그녀는 가난 속에 경쟁했다는 것. 그녀의 싸움은 처절했다. 그런 처절한 삶 속에서 유원지 마술사를 만나 용기를 얻고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는 불안하고 두려웠던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도 마술사 덕에 구원을 받았구나라고. 나보다 더 불우한 환경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싸움을 이겨냈으니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화를 좋아했기에 만화에 공감하고 내 삶에 투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항상 만화 속 주인공을 닮아가려 노력했으니까 말이다.
얼마나 만화 속 주인공을 닮고 싶었는지 그때는 하다 하다 대학교를 가고 싶은 이유가 '연애'였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대학교에 가 연애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학 상담을 했을 때 일이 기억난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과나 학교는 없지만 열심히 공부하려는 동기부여는 있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좋은 대학교에 가면 분명 나와 서로 닮은 인연을 만나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답했다. 담임선생님은 웃으며 이해 주셨지만 내 얘기를 듣던 나이 많으신 부장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소소한 해프닝이었지만 당시 나는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웹툰인 '핑크 레이디'를 보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정말 진지했다.
'핑크 레이디'라는 칵테일의 이름을 빌려온 작품인 '핑크 레이디'(연우, 서나 공저)는 정말로 내 인생을 바꾼 웹툰이었다. 처음 웹툰의 이름과 썸네일을 봤을 때 볼까 말까 정말 고민이 많았다. 들끓는 에너지를 겨우 이성으로 잠재우며 억압과 경쟁의 교실 안에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보내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 와중에 이 웹툰은 그 어떤 웹툰보다도 소녀소녀한 제목과 그림체였기에 절대 열어 봐서는 안 되는 금단의 서적과도 같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웹툰을 열심히 추천해 주었던 나조차도 차마 이것만은 추천해주고 싶지 않았다. 정말 놀림받을까 봐 두려웠다.(지금은 친구던 연인이던 두 번째로 소개하는 웹툰이다. 첫 번째는 이동건 작가님의 '유미의 세포들') 그럼에도 내 이목을 끌게 하고 결국 보게끔 인도한 건 작중 여 주인공인 '한겨울' 때문이었다. 썸네일 속에는 누가봐도 이쁘고 귀여운 캐릭터가 있었다. 비록 만화지만 내 이상형이 있다면 아마 이런 사람일 것이라 확신했다. 이 캐릭터가 너무 궁금해 결국 웹툰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혼자 조심조심 몰래 보기 시작했다.
간략한 줄거리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지만 긴 시간 이별 후 서로 미대생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 여주인공 '한겨울'과 남주인공 '윤현석'의 로맨스를 그린 이야기다. 이 둘은 서로 사랑하며 같이 미술작가로서 성장해나가지만 서로 사랑하고 닮아가기에 서로의 그림마저도 비슷해지는 현상을 막을 수가 없었다. 미술에서 중요한 건 가치와 희소성이기 때문에 한 그림 안에 두 명의 작가는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둘은 어쩔 수 없는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서로 떨어져 있어도 사랑했기에 서로가 계속 같은 그림을, 같은 그림체로 그려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자 서로의 사랑을 인정하고 둘이 하나가 되어 그림을 완성시킨다. 이 작품은 어떤 희소한 가치더라도 사랑이 가장 우선되는 가치임을 말한다. 서로 닮아가는 그림을 그리며 사랑하는 두 주인공에 대한 예찬과 더불어 말이다. 인생 '첫 낭만'이었다. 낭만적 사랑은 바로 이러한 것임을 어럼풋이 느끼게 되었다.
당시엔 이러한 울림이 지금보다는 덜했다. 그때의 나는 절절한 낭만적 사랑을 이해하기엔 어렸다. 지금에서야 그 시절의 내가 어렴풋이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 정도만 깨달았다는 것에 대해 기특하다 생각한다. 어쨌든 이 둘의 절절한 낭만적 사랑을 더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된 건 더 후일이지만 일단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연애란 걸 해볼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남자 주인공인 '윤현석'이란 캐릭터를 닮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처음엔 '한겨울'이란 캐릭터가 맘에 들어 보게 된 웹툰이었지만 다 보고나선 더 기억에 남은 캐릭터는 남자 주인공 ‘윤현석’이었다. 바텐더이기도 한 그가 '한겨울'에게 직접 주조한 '핑크 레이디'를 건네는 낭만과 멋이 가득한 남자 주인공 이었다. (실제로 연인이 생기면 꼭 '핑크 레이디' 대신 '화이트 레이디'라는 칵테일을 마시러 간다. '핑크 레이디'가 아닌 '화이트 레이디'인 이유는 후에 후술 하겠다.) 그래서 이 캐릭터를 닮아가면 로맨틱한 연애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당장 나에겐 낭만도 멋도 없는 그리고 미술 하곤 이미 거리가 먼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시작해야 닮아 갈 수 있는지 고민했다. 고민의 고민 끝에 과감히 '미대생'에서 '미'를 빼고 '대생'만 되기로 결정했다. 그래, 대학생이 될 수 있도록 공부를 일단 열심히 하자. 그리고 좋은 대학교에 가면 분명 저 둘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처럼 좋은 대학교에 가 자신의 진로를 펼쳐나가 보겠다는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나에게 있어 이 결심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엄청난 동기부여였다. 실제로 이로 인해 앞으로의 내 인생이 180도 뒤바꾸게까지 만들었으니 말이다. 인생 '첫 낭만'을 내 삶에 처음으로 투영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렇게 만화(특히 웹툰)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나의 불안정한 사춘기 시절에 내 자아와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큰 일조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누군가 내 삶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나 경험 등을 묻는다면 난 당당하게 '웹툰'이라 말한다. 방금 소개한 일화 말고도 정말 많은 웹툰들이 내 정신과 몸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헬퍼'라는 웹툰의 주인공인 '장광남'은 만화책만 가득한 어떤 갇힌 공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자아와 가치관은 모두 만화를 통해 형성되었다. 마치 나도 그렇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사를 경험을 통해서도 배워가지만 나에겐 '웹툰'을 통해 배워가는 것이 더 많았던 그런 학창 시절이었다.
외부와 단절된 채 세상을 만화로만 배운 '장광남'이라는 캐릭터의 가장 큰 힘은 바로 '상상력'이다. 그런 이유인 건지 나는 내 삶을 살아감에 있어 현실보단 이상을 꿈꾸며 살아왔다. 물론 그로 인해 실패도 해보고 고통도 받아보게 되었지만 '상상력'은 지금도 내게 가장 큰 원동력이자 낭만을 꿈꾸게 하는 나의 친구다. 웹툰을 통해 상상력을 배우고 다시 상상력을 통해 낭만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낭만으로 사는 인생의 첫 관문을 그 시절 처음 열게 되었다. 그렇게 낭만과 사랑에 내가 물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