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낭만은 로맨스가 전부는 아니야, 실패와 고통도 낭만이지
마지막 연인이었던 나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술을 좋아했던 나를 위해 가끔 같이 마셔주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가끔 그녀가 취할 때도 기분 좋게 취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술을 안 좋아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삶이 힘들어서 그래 보였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나는 술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 마시는 애주가인데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술을 하나 꼽자면 바로 와인이다. 나이가 들수록 술을 가려 마시다 보니 자연스레 와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와인은 확실히 포도의 특유한 풍미 속에 담긴 씁쓸한 맛의 여운을 깊이 느낄 수 있는 술이었다. 그래서 좋은 순간을 천천히 오래 느끼고 싶을 때는 여운을 마시기 위해 와인을 마셨다. 나에게 와인은 즐거운 순간을 오랫동안 느끼게 하는 감성과 행복이 담긴 낭만의 술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도 나와 같은 행복을 누리길 바랬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와인을 마시자고 권유했다. 마침 그녀는 와인을 마셔본 기억이 손에 꼽는다고 말했다. 정말 좋은 장소와 좋은 음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 속에서 와인을 마셔본 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여의도에 있는 50층짜리 건물 맨 윗 층에 위치한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녀도 그날만큼은 행복에 가득 찬 얼굴을 하며 내게 고마워했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이렇게 좋은 곳에 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우린 와인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그런데 와인을 마셔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목 넘김이 좋다 보니 꼴딱꼴딱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어느새 금방 취하게 된다는 것을!
평소에 잘 취하지 않던 그녀가 드디어 만취 상태가 된 것이다. 사실 나도 그녀의 만취 상태를 그날 처음 보게 되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았는지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항상 소심하게 행동하던 그녀는 더 이상 없었다. 평소에는 밖에서 하지 않던 애교와 애정공세를 아낌없이 하는 턱에 나는 남들의 눈치를 보느라 애를 먹었다(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하는 수 없이 식당에서 나와 집에 돌아가기로 결정했는데 문제는 집에 가는 길 내내 그녀의 애정공세가 끊이질 않았다. 결국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가 그녀를 잠시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오히려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녀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내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키스에 나는 당황했지만 그럼에도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감기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키스는 분명 달콤했어야 했지만 이내 씁쓸한 맛이 맴돌기 시작했다. 와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슬픈 감정이 와인으로 희석되어 뱉어진 씁쓸한 맛이었을까. 분명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난 그녀의 슬픔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쉽게 누리지 못했던 그녀의 인생을 맛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왜 인지 그날 입맞춤은 더럽게도 치명적이게 달콤했었다.
씁쓸하게도 와인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그런 표정과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깊은 속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녀의 본모습은 결국 행복에 젖고 싶어 했던 그저 가녀린 아이였다는 것을. 그날의 와인은 여운뿐만이 아닌 연민을 담아 마신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