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밤까지 로마를 누비다 1

스페인광장의 라떼 한잔이 우리를 잘못된 선택으로 이끌었다.

by 빌레펠트


로마에서의 첫 아침을 맞았다.


눈을 떠보니 6시였고, 엄마는 5시부터 기상해서 부엌 쪽 테이블에서 조용히 유튜브를 보고 계셨다.


이미 1시간가량을 먼저 일어난 엄마는 심심해 보였고,

여행지에서 그냥 집 안에 있는 시간이 아깝고 지루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방금 눈을 뜬 나는,

아침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했다.

항상 사람이 많기로 유명한 트레비분수는 새벽에 가면 사람이 적어서 사진을 찍을만하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엄마는 사진 찍는 걸 참 좋아하신다.

막상 찍어드리면 두 손가락으로 사진 속 본인을 주욱 확대해보고는 얼굴에 주름이 많다, 칙칙하다, 볼살이 없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신다. 그리고는 휙 삭제해버린다.


딸이 요리조리 눈치 보고 관광객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1초 만에 배경과 엄마의 다리길이(중요함!)와 빛의 밝기 등을 계산해서 최대한 사람들이 안 보이게 후다닥 찍어준 내 노고도 모르고....


사진을 찍고 나면 좋은 것보다 항상 아쉬운 게 더 많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풍경이 좋으면 본인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신다.



8년 전에 같이 일본에 여행 갔을 때는 그렇게 사진 찍기 싫다고 하시더니

지금은 이 많은 사진을 다 보시긴 하시려나 싶을 정도로 많이 찍으신다.


이번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사진과 영상을 많이 찍어두었다가

앨범을 만들어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내 나름대로 열심히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해도 해도 많이 찍으시네' 싶었다.



*일본 여행을 되짚어보니 떠올랐는데, 그때는 사진을 찍기 싫다고 하시긴 했는데 찍어드린 사진을 수시로 확대해서 보고 또 보셨다. 기껏 줄 서서 모시고 간 유명 카페의 맛있는 라떼가 다 식도록 한 입도 안 드시고 휴대폰 속 사진만 넘겨보셔서 내가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에 관심이 많으시긴 했다.*




어쨌든 엄마의 취향을 맞춰드리고자

트레비분수에서 사진을 멋지게 찍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포폴로 광장-스페인광장-트레비분수 코스로 아침산책에 나섰다.


어제 주황빛으로 물들었던 포폴로 광장의 아침은 깨끗하고 맑고, 상쾌했다. 놀랍게도 아침 7시에도 단체투어 여행객들이 꽤 있었다.

포폴로 광장에서 이미 수십 장의 사진을 동서남북 방향으로 촬영하고는 스페인광장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섰다. 사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잘 알고 있는 명품매장들을 지나가며, 골목길에서 말 그대로 윈도쇼핑을 했다.


빛나고 예쁜 것들을 구경하면서 걷다 보니 스페인광장이 짠하고 나타났다.

평소보다는 사람이 없는 것이겠지만 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 여행객들이 있었다.

무릎을 꿇었다가 바닥에 엎드렸다가 요리조리 자리를 옮겨가며 드레스 입은 여자친구 사진을 찍어주는 아저씨를 뒤에서 잘 봐두었다. 그러다가 그 여자친구가 사진 확인을 하려고 아저씨 쪽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얼른 엄마를 그 자리에 세웠다.


"오른쪽을 바라보세요. 턱 내리세요. 어깨 자연스럽게. 팔 한번 탈탈 털고 힘 빼고. 왼쪽 한번 쳐다보고, 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세요."라고 주문하며 후다닥 사진을 찍었다.

엄마에게 그 드레스 입은 여자친구처럼 사진을 확인할 시간을 드리지 않았다. 대신 지금 사람이 별로 없으니 얼른 스페인계단으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자고 끌었다.


아침 7시의 스페인 광장


그리고 트레비분수까지 쭈욱~ 길을 따라 내려갔다. 엄마에게 트레비분수의 숨겨진 창문이나 동전을 던지는 의미 등을 재빠르게 설명하고는 사람들이 더 몰리기 전에 사진을 후다닥 찍어드렸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아침부터 스팟을 옮겨 다니며 포토그래퍼로 빙의해서 열심히 찍었다.


그 와중에 놀랍게도 트레비분수는 아침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겨우 눈 비비고 편하게 동네 마실하듯 나왔는데, 다들 아침 일찍 잘 꾸미고 나온 모습을 보고 다음부터는 사진을 찍어야 하니 조금이라도 꾸미고 나오자고 서로 약속했다.


둘의 사진도 남겨야 하므로, 한국에서 여행 온 것으로 보이는 모녀에게 다가가서 "두 분 사진 같이 찍어드릴테니까 저희도 좀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말을 건넸다. 효도여행이 분명해보이는 그 어머님이 먼저 어제저녁에 도착했는데 잠이 안 와서 아침부터 나왔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도 냉큼 우리도 어제저녁에 도착했다고 맞장구를 치며 잠깐 대화를 나누셨다. 어머니들 대화의 마무리는 "딸이랑 이런 데 같이 오니까 참 좋죠?"였다.


아, 세상에는 효녀가 참 많구나.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페인광장에 들러 커피 한잔을 하기로 했다. 나는 여행을 가면 광장 카페의 야외테이블에 앉아 커피 마시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즐긴다. 비로소 내가 바쁜 일상을 뒤로한 채 여행을 왔음을 느낄 수 있는 사치이자 낭비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돈과 시간은 반비례한다고 생각해왔다.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고, 돈이 많으면 시간이 없다는 사실도 일부 나에게는 맞는 말이다.


회사원으로서 대단한 목표가 있지도 않고, 특별한 재능이나 전문성이 있지도 않은, 그냥 사무직 직장인인 나는 회사에 다니는 것이 내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고 돈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렇게 생각이 미치는 데까지는, 월급루팡인 '아무것도 안 할래, 난 아무것도 못해'인 상사 덕분이었다. 업무양이나 성과가 내 절반도 못 미치지만 호봉에 따라 나보다 2배가량 많은 급여를 받는 그 사람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만든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나에게는 사치이고, 여행지에서만큼은 꼭 사치를 부린다.




카페에 앉아 엄마에게 유튜브로 배운 내용을 전달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침에만 카페라떼를 마신대. 오후에 카페라떼를 주문하면 이상하게 본대. 그러니까 우리 아침이니 카페라떼를 마시자."


한껏 여유를 부리며 라떼를 두 잔 시켰다.


"어머, 라떼가 어쩜 이렇게 쓰지도 않고 부드럽기만 하니? 집 앞에 있는 카페는 라떼가 너무 써서 맛이 없는데, 이탈리아 커피가 왜 유명한지 알겠다."


아침부터 잔뜩 사치를 부려서 행복이 가득 충전된 딸,

로마의 첫 아침, 관광명소 한가운데서 마시는 라떼 한잔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엄마.


로마에서 첫 커피, 3만보의 시작


우리는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그날 아침, 잘못된 선택을 한다.


원래 계획한 대로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일대를 둘러보고 여유 있게 그 근처에서 맛있는 거 먹고, 쉬엄쉬엄 다녔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무리 날씨가 흐리고, 흙비가 내렸더라도 로마가 더 좋았을 거다.


원래 계획한 대로만 다녔더라면

나보나 광장의 폭우 속에

엄마를 홀로 내버려 두고

자리를 떠나진 않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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