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여행테마는 효도인데. 그래서 실은 효녀가 아니었던 내가 효녀 코스프레를 하느라 첫날부터 잔뜩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그놈의 야경이 뭐라고....
로마에서 모든 힘들었던 일들과 내 실수와 후회는 무리했던 야경투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어제처럼 여행하지는 말자고 몇 번이나 서로의 다짐을 받고는, 오전에 숙소에서 푹 쉬었다.
그래도 하루종일 숙소에서 쉴 수는 없었다. 왜냐면 오늘은 점심즈음에 보르게세 미술관을 예약한 날이었다.
나름대로 늦잠을 자고, 천천히 여유를 즐기고자 브런치를 먹으러 집 앞 포폴로 광장에 갔다.
광장 가장자리를 따라 펼쳐진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한껏 사치를 부릴 예정이었다. 근데 날씨가 심상치 않다. 하늘은 회색빛에 바람은 쌀쌀했고, 빗방울이 떨어질락 말락 했다.
심지어 광장에 위치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야외 테이블 자체를 아예 펼치지않을 정도로 궂은 날씨였다. 우리는 숙소에서 한 블럭 떨어진 카페의 2층에 올라갔다.
나는 팬케이크를, 엄마는 브런치세트를 먹었다.
(양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펜넬이었던 샐러드가 엄마는 입맛에 너무 잘 맞는다며 좋아하셨다.)
엄마의 브런치 메뉴, 펜넬샐러드와 요거트, 토스트
"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카페의 브런치가 참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던" 하루의 시작이었다.
브런치를 즐기는 와중에도 난 고관절이 너무 뻐근했고, 종아리가 뭉쳐서 아팠다. 엄마는 허벅지 근육이 아프다고 하셨다.
우리는 오늘 유일하게 예약된 일정인 보르게세 미술관을 다녀오고 나서 맛집에서 밥이나 먹고 들어오자고 약속했고또 다짐했다.
정말로 설렁설렁 다닐 예정이었다.
브런치를 즐기고 천천히 보르게세 공원에 도착한 후, 한참을 공원을 걸어서 마침내 예약된 시간에 맞춰 보르게세 미술관에 입장했다.
당시 미술관 부분 공사로 인해 카라바조 작품들은 다른 미술관에 있다며, 미술관 직원이 친절하게 위치를 알려주셨다. 이 티켓을 가져가면 몇 시에 방문하든 관계없이 관람할 수 있다고,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오히려 공사로 축소된 미술관이 좋았다.
보르게세 미술관의 감탄이 절로 나오는 조각들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던 조각 작품들은 제자리에 있었고, 어두침침한 바로크의 카라바조 작품을 엄마가 좋아하실 거 같지도 않아서 패스해도 될 거 같았다.(며칠 후 피렌체 우피치에서 엄마는 카라바조 매력에 빠졌다. 난 여전히 엄마를 잘 모른다.)
보르게세 공원
한국에서 계획을 짤 때만 해도 보르게세 공원에 가서 돗자리 깔고, 두어 시간 누워서 간식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려 했다. 막상 그날이 되자 흙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의 체력이나 상황도 마땅치 않았다.
공원과 이어진 핀쵸언덕 테라스(Terrazza del Pincio)에서 한눈에 펼쳐진 로마시내를 내려다보며, '우리 집이 저기 있네~ 우리가 오늘 저기서 브런치를 먹었다'등등 이야기를 쏟아내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광경과 머릿속에 있는 로마지도를 맞춰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틀 만에 우리 집부터 어딘지를 찾았고, 내일 갈 바티칸을 가리켰다.
다시 집으로 복귀해서 쉬면서 맛집을 검색했다. 정말로 이른 저녁만 후딱 먹고는 들어올 생각이었다. 근데 내가 찾는 맛집들은 다 판테온 근처였고 또 이탈리아까지 왔는데, 유명한 타짜도르 에스프레소도 엄마께 맛 보여드려야지 하는 말도 안 되는 효녀주의보가 발동했다.
또 슬쩍 엄마께 의견을 묻는 척 이야기를 건넸다.
"엄마 어제 야경투어 때 봤던 판테온 기억나지? 모든 신들의 신전이었던 곳. 거기 안에 들어가면 라파엘로 무덤도 있고 지붕 중간이 뻥 뚫려있는데 건축물로써 의미 있거든."
"기억난다. 거기 근처에서 젤라토 먹었잖아."
"맞아. 거기 딱 근처에 에스프레소 유명한 집도 있고 내가 찾아본 맛집들이 다 거기 근처네?"
"그럼 여유 있게 가서 식사까지 하고 들어오자. 뭉친 다리 근육도 풀 겸 나가서 좀 걷지 뭐"
그렇게 우리는 집을 나섰고, 흙비는 멈춰있었다.
정말로 이렇게 흙비가 내렸다. 내 우산도 이랬다.
판테온 내부를 둘러보고, 타짜도르에 줄 서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더니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져내렸다. 그래도 골목길을 잘 찾아들어가 양고기와 아티초크요리, 소꼬리찜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각자 우산 하나씩을 붙잡은 채 나보나광장 근처 버스정류장으로 왔다.
정말 폭우가 쏟아졌다.
근데, 교통티켓을 파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미리 지하철역에서 넉넉히 사둔 교통권이 마침 똑 떨어졌다.
신발과 바지가 비로 젖었고,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눈앞에서 지나가버렸다.
교통권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나에게 화가 났고, 우산을 들고 휴대폰을 두드려가며 지도앱을 보며 길 찾는 것도 힘들었고, 아무리 찾아봐도 버스티켓을 사는 곳은 안보였다. 솔직히 그 순간, 나의 여행메이트인 남편이 같이 있었으면 각자 역할을 나눠서 바로 해결책이 나왔을 거 같았다.
어디로 갈지도 내가 정하고, 길도 내가 찾아야 하고, 통역도 내가 해야 하고, 거기다가 소매치기로 보이는 수상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긴장하며 엄마를 챙겨야 하고, 나도 잘 모르는데 엄마는 계속 질문을 해서 대답하느라 바쁜데 비까지 쏟아졌다.
우산을 목과 어깨에 끼운 채 한쪽 어깨는 가방을 메고, 양손은 휴대폰으로 검색하면서 주위도 살펴야 하는 고난이도 상황이었다.
(나는 비 맞는걸 너무너무 싫어한다. 특히 신발과 바지가 비에 젖는 게 끔찍하다. 비 오는 날은 무조건 운전해서 출퇴근한다.)
난 잔뜩 짜증이 난 채로 엄마에게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기다리시라고, 곧 버스티켓을 사오겠다고 말하고는 빗 속으로 사라졌다.
한 블럭 두 블럭 근처를 돌면서 나보나 광장 속으로 들어왔다. 하아.... 숨통이 트이는 거 같았다.
엄마를 버스정류장에 하염없이 세워두고 난 혼자가 된 지금 이 순간, 미안하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이미 버스티켓은 잊었다. 나는 자유가 조금 필요했었나보다.
사실 효도여행으로 프레임을 씌워놓고 나 좋자고 엄마랑 여행 온 건데, 깜냥도 안되면서 무리하다가 옆구리가 툭 터져버린 모양새였다.
그래놓고 혼자서 잠시 돌아다녔더니 홀가분한 마음이 들면서 차분해지는, 그리고 그런 내 이중성을 확인하고는 몰려오는 죄책감....
됐다. 돌아가자.
택시 타고 집에 가면 되는데, 왜 교통티켓이 없다고 짜증이 난 걸까....
한 20여분이 걸렸을 것 같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상황이 정리가 되면서 왜 버스에 집착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돌아갔다. 엄마는 우산을 꼭 붙들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계셨다. 내가 참 나빴다.
엄마는 나만 믿고 여기까지 온 건데, 내가 사라져버린 20분이 엄마에게는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갑자기 무섭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하다.
아까보다는 밝아진 목소리로
"엄마, 교통티켓 파는 곳을 못 찾겠어.
우리 그냥 택시 타고 가자~"라고 했고
엄마는 "안 그래도 너 돌아오면 우리 택시 타면 안 되겠냐고 물어볼 참이었어."
여행경비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이번 여행에서 택시를 자주 타고 다녔으면서 그날은 왜 그렇게 버스만 생각했을까.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아마 몸도 피곤하고, 폭우에 정신도 없어서 여기로 나올 때 탔던 게 '버스'니까 당연히 돌아가는 것도 버스만 생각했었나보다.
나보나광장 폭우 속에 엄마를 홀로 내버려 두고는 나도 모르게 해방감을 잠시 느낀 내가, 지금도 낯설다.
죄책감은 그 부피만큼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있는데, 희한하게 마음이 탁 트이는 그 기분도 여전히 떠오른다.
나는 이 날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다시는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리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며칠을 가지 못했다.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참고 또 참으셨을텐데
나는 진짜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철이 없구나.' 하는 자괴감과 실망감이 몰려오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