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만족을 위해 희생을 강요당한 맏이의 삶
나는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이 읍단위 소재지에서 성장하였으며 국민(현재의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대도시 소재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부모님께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하얀 자루에 쌀을 담아 하숙집 주인에게 전달하였다
그것이 하숙비였다. 가끔은 내가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를 타고 고향에 들러 쌀자루를 둘러매고 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흙먼지 날리며 흔들거리는 만원 버스 속에서 입석으로 3시간을 오다 보면 멀미로 토하기도 했다. 하숙집에서는 혼자 무서워 밤에 백열전등을 켜놓고 자다가 하숙집 주인에게 야단을 맡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숙을 하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 부모님께서는 동생들을 포함한 자녀들 교육을 위해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가 있는 도청소재지로 이사를 오셨다
그리고 2년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서울로 진학을 하여 서울에서 다시 하숙생활을 시작하였다.
군 복무와 대학을 마치자마자 취업을 하고 가정도 꾸렸다.
그리고 신혼 때부터 매 명절마다 당시에는 15시간씩 걸려가며 귀향을 했다. 운이 없는 해에는 명절 연휴에 당직근무 명령이 내려와 고향에 갈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럴 때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나 대신 당직근무를 수행할 동료를 찾아 부탁하고 사례를 하기도 했다. 단 한 시간이라도 고향 부모님과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연휴 시작 전날부터 연휴 마지막말 오후까지 고향에 머물렀다. 마침 우리 부부는 고향이 같아 고향 방문 시 아내의 친가에 들르는데 불편이 없었다. 아내는 명절 당일 차례를 지내고 상경하자고 졸랐지만 나는 잠시라고 부모님 곁에 더 머무르려 했다. 어느 추석 명절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연휴 시작 전날 출발하여 고향에 도착한 이튿날 아내가 혼자 차례상을 준비하는데 저녁이 되어도 부모님 집 근처에 살고 있는 남동생 경수 가족은 나타나지 않아 아버지께 그 이유를 물었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어서 아버지께 사정을 여쭈었다. 아버지께서는 경수 처(나에게 제수씨)가 이번 명절에 서울에서 개인 특별영어과외가 있어 사정상 이번 명절에 오지 못한다 하여 이를 허락하셨다는 것이었다. 제수씨는 사대 영문과 졸업 후 영어학원을 운영하였는데 제법 잘 나가는 유명 원장 강사였다. 나는 갑작스럽게 정해진 날자도 아니고 이미 정해진 추석명절에 왜 과외일정을 잡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불평을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내가 허락한 일을 감히 네놈이 시시비비를 따지느냐. 그리 못되게 굴 바에는 내 집에 오지 말거라" 하시면 나를 꾸짖었다. 내 입장에서는 너무 어처구니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내 집에 오지 말거라"라는 말이 지금도 가슴에 사무친다. 내가 갈 곳이 없어 아버지 집에 얹혀 살러 온 것도 아닌데... 설사 얹혀 살러 왔다손 쳐도 그 말을 들었다면 서운했을 듯했다. 이런 서운한 생각을 갖고 명절 연휴를 마치고 상경하여 막내고모(아버지의 여동생)에게 사정을 말하고 하소연하였다. 고모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부모가 아무리 너에게 심한 말을 했어도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를 고깝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말을 듣고 그런 말을 해준 고모가 참으로 훌륭해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기분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잊자. 그리고 명절이 오면 선물 보따리 싸들고 여느 때처럼 아버지를 방문하자 하고 결심하였다.
신혼 때 우리 부부는 맞벌이였는데 부모님이 상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음에도 부모님은 둘이 버니 한 사람 몫은 송금하라 하셨다. 우리 부부는 매월 아내 월급의 약 반정도를 부모님께 송금하였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예삿일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부모님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당시 부모님은 생활비가 부족하여 우리에게 매월 송금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절약하며 자식을 아까는 분들이셨지만 자식을 키워 이제 아들로부터 효도를 받는다는 심리적 만족감이 크셨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나를 보면, 동네 이웃 친구들 자식들이 불효한다며 흉을 보는 한편 본인들은 동네 노인친구들과 주변 이웃들에게 내 큰아들이 이렇게 매달 용돈을 보내준다며 자랑을 하시곤 하였 다한다. 부모님은 내가 보내주는 용돈이 생활에 필요해서가 아니고 내 자식이 이렇게 든든한 직장에 다니며 용돈도 준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는 우리 내외가 부모님 방문 시마다 문 앞에서 큰절을 요구하시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방문 시 아버지께서 요구하신 대로 방문하자마자 큰절을 올리겠다고 아이들을 내려두고 거실입구에서 서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우리를 맞이 한 후 손주들을 앉고 어르기에 바쁘셨고 아버지도 정작 하시던 일을 마저 마치기 위해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밖으로 나가시는 아버지를 붙들고 큰 절 받으시라고 부탁드리자 그제야 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머니가 손주들과 함께 노시느라 절 받으실 자리에 오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지시대로 큰절을 올리려 했으나 막상 부모님은 큰 절 받으실 준비를 하시지 않아 시간을 많이 끌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렸을 때 나의 할머니 방문 시 아버지가 할머니(할아버지는 나 태어나기 전 돌아 가심)에게 큰절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무슨 큰절이냐며 끝내 거실 상석에 나타나지 않으셨고 불가피하게 아버지에게만 절을 올렸다. 이런 해프닝으로 그다음 방문 시 큰절 올리는 것은 유야무야 없어졌다.
부모님 세대에서는 성장한 자식에게서 유교적 예법에 따라 효도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던 것 갔았다. 특히 맏이인 나에 대하여는 그런 기대가 컸던 것이다. 몇 년 후 손주들이 태어나고 신혼으로 마련한 12평 주공아파트 전셋집이 비좁아 이사할 때까지 수년을 송금하였다. 지금도 아내는 가끔 부모님께 용돈 보낸 그때를 곱씹어 불평을 하곤 한다. 사실 우리도 그리 넉넉하지 못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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