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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Jun 30. 2019

오이김치 한 입과 함께 여름이 시작되는 날

종이 동물원

엄마가 보내 준 오이김치를 아삭 베어 물면 아, 여름이 온 줄 알게 된다. 수박도 냉면도 빙수도 좋아하지만 나의 미각에 여름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표지는 역시 엄마표 오이김치다. 채 썰어 양념한 당근과 파를 십자로 칼집 낸 오이 사이에 터지기 직전까지 잔뜩 집어넣은 오이김치는 입으로 베어 무는 게 제 맛이다. 볼이 불룩해지고 잇새에 고춧가루가 끼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려면 집에서 혼자 넷플릭스와 마주 앉아 보는 게 최고라는 사실도 덤으로 알려드리겠다.


-야, 난 우리 엄마가 만든 거보다 김밥천국에서 오천원 주고 사 먹는 밥이 더 맛있던데.

   

염세적인 말투로 집밥이 다 맛있는 건 아니라고, 그건 엄마가 어느 정도는 요리를 잘 한다는 사실이 전제로 깔려 있어야만 가능한 낭만이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세상에. 그 때는 그 말을 듣고 MSG의 세례 속에 성장했을 그 친구의 미각에 심심한 애도를 표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에게도 집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다른 무언가가. 모든 사람들에게 어머니란 생의 시작점이므로.


지난 주 있었던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산 박성우 시인의 시집에도 어머니에 관한 시가 두어 편 실려 있다. 그 중에서도 <오래된 습관>이라는 짧은 시 한 편을 옮겨 적어 본다.


지난 초겨울, 별다른 기별 없이

시골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였다


하이고 밥 없는디 어쩐다냐,

노모는 멀쩡한 싱크대 수도 놔두고

마당 수돗가로 후다닥 나와

찬물로 찰찰, 쌀을 씻으셨다


기별 없이 찾아온 자식을 위해 ‘찬물로 찰찰’ 쌀을 씻는 늙은 어머니의 뒷모습에는 제목처럼 ‘오래된 습관’ 같은 따스함과 애잔함이 있다. 어머니, 그것도 나이든 어머니란 세상 모든 아들딸들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보편적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런 따스함과 애잔함을 SF 소설집에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읽다가 왈칵 눈물을 쏟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는 마음을 건드린다. 당신이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느끼며 자랐든 아니든 간에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분명 마음 어딘가가 울컥 건들리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종이 동물원>은 사실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다른 단편작들과는 다소 이질적이다. 서사의 규모도 가장 작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 <종이 동물원>인지 알게 된다. 이 이야기에는 보편적인 어떤 감정이 있다. 흔하고 뻔한 재료들로 만든 오이김치 한 토막처럼 별 대단할 것도 없는데 한 입 베어 물고 나면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그 맛이 생각나게 한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울고 있는 내 모습에서 시작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은 물론 엄마이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포장지를 접어 종이호랑이를 만들어 준다. 엄마가 숨결을 불어 넣어주자 종이호랑이는 살아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이 아름다운 마법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이에게 엄마는 어느 순간 극복해야 할 짐이 된다. 왜냐하면 엄마는 미국에 살면서도 영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쭉 째진 눈과 뻣뻣한 검은 머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엄마는 중국인이다. 아이는 여느 미국 아이처럼 성장하기 위해 빠르고 잔인하게 엄마에게서 멀어진다. 영어로 말하라고 소리치는 어린 아들과 그런 아들의 편에 선 남편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랑(love)’이라고 말할 때, 난 그 말을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이(愛)’라고 말하면,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하는 그대로 흘러간다. 엄마의 사랑을 모르던 자식이 뒤늦게 이를 깨닫게 된다는 뭐 그런 전개이다. 그런데 이 흔하고 신파적인 이야기를 잘 들여다 보면 작가 켄 리우가 소설집 전반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주제가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 문화 간의 충돌, 환상과 현실의 경계, 역사적 비극까지. 그런데 이 거대한 주제들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물감을 주지 않는다. 이 소설집의 마지막 수록작인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이 기발한 과학적 상상력과 다큐멘터리 방식을 차용한 독특한 전개, 거대한 서사적 규모에도 불구하고 주제 의식이 스토리를 압도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잘 쓴 이야기는 감정을 건드린다. 하지만 감정만 건드리고 끝난다면 처음 먹었을 때는 맛있지만 이내 질리고 마는 인스턴트 음식과 다를 바 없다. 그 감정 속에 녹아 있는 생각거리들이 씹으면 씹을수록 긴 뒷맛을 남기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일 것이다.


<종이동물원>의 작가 켄 리우는 좋은 이야기를 쓸 줄 안다. SF 소설 작가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좋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어떤 분야의 설정과 상상력이든 녹여내어 쓸 줄 아는 작가이다. 정말 좋은 이야기를 읽고 나면 대개는 ‘와, 죽었다 깨어나도 난 이렇게는 못 쓰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켄 리우의 소설집을 읽고서는 ‘와, 죽었다 깨어날 만큼 애를 써서라도 한 번은 이런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제일 흔한 말에도 가슴에 손을 얹을 수 있는 이야기를 나도 쓰고 싶다. 엄마가 만들어 준 반찬보다 맛깔 나는 그런 이야기를 언젠가는 시작할 수 있게 될까.



bgm.강아솔_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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