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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Jul 07. 2019

찌는 듯한 공기의 방문에 몸도 마음도 방전된 날

불안 그리고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충전은 방전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무언가를 충전해야 하는 상태란 충전하지 않으면 방전이 되는 상태임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대부분의 움직이는 것들은 충전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에너지의 공급이 없다면 언젠가는 멈추고 마는데 격렬한 움직임에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심지어 가만히 있을 때조차 존재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에너지가 소모된다. 충전이 다 되면 콘센트를 뽑으라는 절약 캠페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의 마음도 쉽게 방전된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기들처럼 지속적인 충전이 필요하다. 문제는 기기들을 충전하기 위한 방법이 110볼트니 220볼트니 하는 식으로 규격화되어 있는 반면 인간의 마음은 딱 맞는 콘센트를 찾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오래 전 흥행했던 드라마 <최고의 사랑>에서 독고진이 구애정과 이마를 맞대고 “충전”이라고 읊조리는 대사가 수많은 여심을 설레게 한 것은 딱 맞는 마음의 충전기를 찾는 일이 그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인간이 지닌 대부분의 불안은 바로 이 끝없이 방전되는 마음의 성질에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마음이란 게 한 번의 사랑으로 충전되어 그 상태를 쭉 유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면 참 좋으련만 불행히도 이 마음은 지속적인 사랑의 충전을 요구한다. 그리고 방전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기기와 달리 인간은 한 번 방전되고 나면 다시 쉽게 충전된 상태로 다시 넘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안에 떨며 안정적 충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돈과 명예, 사회적 능력 등을 수집한다. 마치 수컷 새가 암컷 새에게 사랑받기 위해 둥지에 반짝이는 것들을 잔뜩 끌어 모아 장식하듯이. 이러한 수집은 유효한 듯하면서도 유효하지 않다. 마음이란 그 어떤 것과도 그렇게 단순한 비례 관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봄날은 간다>에서 그토록 허탈한 얼굴로 이 대사를 읊조리던 상우도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사랑의 퇴색을 받아들인다. 그가 채집하고 있는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는 소리들처럼 사랑은 변하고, 그래서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은 늘 어쩔 수 없는 불안의 노예이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해결책으로 ‘예술’, ‘종교’, ‘보헤미안 정신’ 등을 제시하지만 모두 다 썩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지위가 애정을 담보하리라는 맹목적인 믿음은 희석시킬 수 있어도 여전히 마음의 구멍은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위대한 예술도 철학도 종교도 이 구멍을 메울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구멍을 바로 보도록 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이 그러하듯이.


다시 한 번 첫문장을 반복해본다. 충전은 방전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방전되지 않는다면 충전할 수도 없다. 소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주인공 라비 칸을 통해 장장 한 권에 걸쳐 뜨겁게 빠져들었다 끝나버린 사랑의 과정을 낱낱이 분석하고 푸념하던(실제로 이런 남자친구가 있으면 아주 무서울 것 같다) 알랭 드 보통은 21년 만에 출간한 새 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서 라비 칸의 또 다른 삶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청년기를 거쳐 중년에 접어든 라비 칸의 사랑과 삶은 충전되었다가도 방전되고, 그렇게 방전되었다가도 다시 충전되기를 반복한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긴 이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외롭고 불안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족함이 있어 삶은 순간순간 변모하고 마음은 새로운 방식으로 차오른다. 생각해보면 한 번 빨간색으로 충전된 마음이 방전될 일 없이 이어진다면 그 마음은 영영 노란색이나 초록색이 될 가능성은 없어지는 것이다. 마음의 방전이 있어 우리는 변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지 않다는 호언장담 따위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자주 불안해진다는 솔직한 고백을 신뢰한다. 우리는 연애를 하는 순간에도 불안하다. 다만 그 불안을 똑바로 바라볼 때 불안은 우리를 집어삼키는 대신 안아주리라 믿으며, 그렇게 나는 오늘도 규격 없는 콘센트를 삶에다 꽂아 본다.




bgm.다린_제목 없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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